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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숭례문』단상(斷想) Ⅲ : 그 진정성

by 답설재 2008. 3. 9.
 

○ “문화재청은 11일 오전 숭례문 현장에서 문화재위원회 긴급회의를 열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내놓지 못한 채 ‘숭례문 복구 기본방침’을 발표했다. ▲남아 있는 부재(部材)를 최대한 다시 사용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이를 위해 문화재위원과 소방관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복원자문위원회를 만들며 ▲기존 부재의 구체적인 사용범위는 현장 확인조사와 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추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조선일보,2008.2.12.5면)

숭례문 화재는 10일 밤에 일어나 11일 첫새벽까지 5시간 동안 이어졌으므로 문화재청은 매우 빨리 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그런 회의를 하면 뭐 하나’ 싶은 일은 당장 일어났다.

“화재로 전소된 국보 제1호 숭례문의 일부 잔해가 이미 폐기처분된 것으로 드러났다. 소방 당국이 굴착기로 현장을 파헤치는가 하면 문화재청은 타다 남은 자재를 폐기물 처리장에 내다버렸다고 한다. 속죄의 현장에서 국민 일반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이없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어 문화재 보호․보전이 제1 책무인 문화재청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회의케 할 정도다.”(문화일보,2008.2.15.31면)

○ “김상구 문화재청 건축문화재과장은 “대체로 원형을 복원하는 데 2~3년, 예산은 200억원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또 일제강점기에 변형됐던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2008.2.12.5면)

‘그렇다면 별것 아니네.’ 너무 놀라워하지는 말고 조금쯤은 안심하라는 뜻일까. ‘오히려 전화위복이네’ 다행스러워 해도 좋다는 뜻일까. 전 세계를 누비며 높다란 집을 짓고, 바다든 어디는 필요하다는 대로 긴 다리도 놓아주며, 지구촌 곳곳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나라이므로 ‘이제는 문화재까지도 그대로 복원해내는구나!” 해도 좋을까. 신문의 헤드라인들이 내 경솔한 생각을 뒷받침한다.「실측도면 있어 희망적… 복원 2~3년 걸릴 듯」「숭례문 ‘잃어버린 성벽’ 다시 살린다」우리가 하도 기가 막혀하니까 위로하려는 걸까. 부수고, 없애고, 다시 만드는 데 ‘귀신같은’ 우리들 자신을 우리들 자신이 위로하며 살고 있는 걸까.

“후손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재를 관리․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못했으니 직무유기를 한 셈이죠. 새로 짓는 숭례문은 건축도 중요하지만 사후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매일경제, 2008.2.12.37면)

조선시대 숭례문 축조를 지휘했던 한성부판사 최유경(1343~1413) 후손, 대목장(大木匠) 최기영 씨의 말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언급을 읽고 있는 처지로서는 한없이 서글프고, 그 원로의 비장한 언급도 마음에 닿지 않는다. ‘그처럼 소중한 것이 600년을 지탱하다 이미 다 타버렸는데…….’ 자꾸 그 일에만 골똘해진다. 누구도 복원을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보다는 “이제 우리의 서울에 뭐가 남았나? 아직 많이 남아 있는가? 그건 괜찮은가, 정말 잘 있는가?” 그런 것부터 충분히 이야기하면 더 좋겠다.

○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지정된 것은 1962년 12월. 당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중략)… 문화재 관리를 위한 일종의 고유번호이기 때문에 국보 1호가 가장 가치 있는 문화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보 1호가 된 이상 그 상징성은 적지 않다. 바로 이 상징성 때문에 숭례문 국보 1호 자격은 늘 명암이 엇갈렸다. 가장 심각했던 논란은 숭례문 국보 지정이 일제 잔재의 답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시작됐다. 숭례문이 일제에 의해 조선 고적(古蹟) 제1호로 지정됐으며 이것이 광복 이후 국보 체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매일경제, 2008.2.12.35면)

우리는 ‘일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일제’라는 의식 때문에 제 살을 베어내서도 안 된다. ‘일제’가 35년간이나 지배한 이 나라에 ‘일제’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구석이 어디 있을까. 잊고 싶다고 외면해서는 우리가 손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그림자를 지우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 뚜렷한 사례다. 숭례문이 국보 1호였던 것이 그렇게 못마땅했다면 이번 화재 시에는 왜 아무 말이 없었고(“차라리 잘 됐다. 이참에 국보 1호를 바꾸자.”고 하면 좋을 것 아닌가), 숭례문을 복원하게 되면 ‘국보 1호’의 자격을 유지할까 못할까만 논의되고 있는지 가증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숭례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국보 1호 자격이 없다.” “아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국보 1호 자격이 충분하다.” 어느 쪽에 진정성이 있는가. 우선 그 진정성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굳이 그런 소리를 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면 불타 없어지고 나니까 그립고, 볼 수 없게 되니까 그 소중함을 알 수 있겠다는 것인가. 이래저래 숭례문은 슬프다. 그런 구박을 받으며 지냈기 때문에 불타기 전에도 서글펐고, 불타고 나서도 서럽다. 정말 그렇다면, ‘왜놈들’이 조선 고적 1호로 지정했던 사실이 게름직하다면, 가령 ‘훈민정음’이나 석굴암이 국보 1호가 되는 것이 더 마땅하다면, 그것은 혹 그 ‘왜놈’들이 만져보고 갔는지 용케도 그들의 접근을 피할 수 있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렇게 지정된 국보 1호가 ‘왜놈들’의 손길 때문에 또 바뀌는 일이 없을 테니까.

○ 숭례문에 불을 지른 노인이 붙잡혔다. 그는 토지보상금이 미흡해서 그랬다면서 “그래도 인명피해는 없었지 않았느냐?”라고 했단다. 요령껏 불을 붙였다는 뜻일까.

신문은 요란스레 그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었지만 그런 인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기도 싫다. 꼭 화가 났을 때의 지지리도 못난 내 모습 같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토지보상금으로 수 억, 수십 억, 수백억 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 저렇게 살 수는 없나. 나는 끝까지 아등바등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 조상은 이 넓은 산야에 어떻게 단 100평의 땅도 남겨놓지 않았는가?’ 한탄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오늘은, ‘토지보상은 이 땅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 본성을 잃게 하고난 뒤에야 끝날 일인가’를 생각한다. 아, 불쌍한 늙은이여!

○ 그 숭례문, 그 서울남대문이 불탄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다. ‘택시기사가 가장 서글퍼하는구나’ 싶다가 꽃을 바치고 메모를 남기는 아이들을 보면 ‘아, 저들이 더 안타까워하는구나.’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어했고 어처구니없어했고 화를 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보라! 태안기름유출사고 현장을 찾고, 남대문을 찾아 그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는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며 우리들 자신을 추켜세울 것까지는 없다(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할 사람, 혹은 장차관 같은 걸 할 사람인가?’ 그런 생각부터 드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어이없다고? 어처구니없다고? 화가 난다고? 그럴 것 없기 때문이다. 다 인과응보이기 때문이다. 불씨가 없는 곳에서 불이 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 우리 생활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정치와 행정이, 경제지상주의의 우리 생활이, 내가 담당한 교육이 저질러놓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저질러놓은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이러한 재앙, 이러한 끔찍스러움, 이러한 슬픔이 언제 끝날지, 끝날 수 있긴 한지 그것부터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고?” 얼른 소리치고, 추켜세우고, 나서고 하지 말고, 불타버린 그 ‘숭례문’의 모습처럼 입 꼭 닫고 조용히 생각하고 눈물부터 충분히 흘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