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율리4 이신율리 「안개의 노래」 안개의 노래 이신율리 풀이 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안개가 태어난다멜로디와 발굽을 감춘 세계가 돋아난다이곳은 풀밭이 뛰어다니거나발굽을 잃어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엎드린 저녁은 기도를 모르지풀밭을 덮는 폭설을 모르지양의 기분은 묻지 않는다멀리 있는 평안을 바라봐야 하니까양의 목소리를 닮기 위해뒤꿈치를 들고 여러 번 마른풀을 읽고 지나간다양 너머에서 안개의 노래가 깊어진다여럿이서 혼자가 되는 안개의 시간양 한 마리 겨우 들어갈 만큼 좁거나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곳에서출렁거리는 양 떼처럼 노래를 부른다조금 있으면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어제 날아온 새가 다시 날아올 것이다뛰어다니던 풀밭은 풀밭으로잃어버린 발굽은 무너지지 않는 발굽으로고요한 양은 없어흰 양이 태어나겠지잡히지 않는 성자의 .. 2024. 9. 9. 이신율리 「국화 봉고프러포즈」 국화 봉고프러포즈 이신율리 마드리드 산히네스에서 추로스를 먹던 아침, 터키석 하늘에 태엽을 감았지 몇 바퀴를 돌렸으면 팝콘이 터졌을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까 끈적이는 생각에서 발을 빼면 어두워지는 한 강가야 오리 가던 길 되돌아오고 강물 소리 맞춰 봉고 돌아오고 트렁크를 활짝 열었어 풍선이 떠오르는 하늘이 넘쳐났지 그녀는 프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초코라테 셔터를 눌렀지 펄 립글로스 없이도 사진 잘 받겠다고 오늘 거울은 마음에 든다고 추로스를 먹던 아침 총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새를 보고 네가 웃었던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애드벌룬이 둥둥 떠올랐지 너는 커다란 프릴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제라늄 화분이 자꾸 시든다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앵두 등을 켰어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볼륨 높였지 노란 .. 2023. 10. 5. 이신율리 「달팽이의 비문증」 달팽이의 비문증 이신율리 나비가 바다를 끄는 암초 숲을 지나고 있어 동공에 쌓은 오래된 질문, 왼돌이 달팽이의 등은 바람을 만들지도 몰라 이마를 짚어주는 더듬이 달팽이가 밟으면 가장 얇은 소리가 난다는 길을 비켜가지 길이 생겨나고 있어 물방울 계단을 허물지 않고서도 구름처럼 입 꾹 다물고 맨살을 내어줄 수 있는 이유 주근깨 돋는 한낮은 안개꽃 천지야 동공 속 이야기를 지고 두더지는 파밭을 언제 다 지나가나 눈 뜨고 자는 밤엔 이 밤부터 내일까지 비가 올지도 몰라 크고 둥근 뼈를 그려보거나 처음 들었던 빗방울 소리를 떠올리면 뿔이 쑤욱 자라서 느리게 넘기는 페이지는 왜 그렇게 질문이 많은지 살만한 이유에 물기 돌면 풋살구 같은 신 벗고 바다를 향해 꿈쩍꿈쩍 나아가지 물결처럼 팽이를 감고 질문인 것처럼 문을.. 2022. 12. 2. 이신율리 「콜록콜록 사월」 콜록콜록 사월 이신율리 배꽃이 질 때까지 나는, 사월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발이 작은 운동화는 팔지 않았다 참외에서 망고 냄새가 났다 사월이 콜록거렸다 푸른 것은 더 푸른 것끼리 속아 넘어가고 흰 것은 흰 것끼리 모였다 배꽃 같은 나이를 뒤적거렸다 달아나지 않으려고 네 칸짜리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하루가 갔다 하늘은 내일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배꽃의 잔소리가 4차선 도로까지 따라왔다 노래하나 물고 새가 날아갔다 잃어버린 가사가 둥둥 떠다녔다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지나갔다 초록 티셔츠를 입은 울창한 숲이 아무도 모르게 헛발질을 했다 떫고 신 것들이 툭툭 나이만큼 떨어졌다 열다섯 살에 잠갔던 배꽃이 먼 쪽에서부터 피기 시작했다 구름 뒤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는 숲을 찾고 있었다 .. 2020. 5. 1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