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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안동의 해학4

"목목문왕(穆穆文王)이여" 음담패설을 유난히 밝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여겨서 무모하게,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모처럼 남녀 동기회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퇴임들을 했기 때문에 참석자가 많았다. 1박 2일간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점심식사도 거의 끝나서 곧 헤어질 시간이었고, 다음에는 또 언제 이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 숙연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학교 다닐 땐 말도 없이 겨우 얼굴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해버렸다. 모두들 껄껄 웃었고 여성들도 그렇게 웃거나 두어 명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개그나 해학이 아니었다. 저속하기 짝이 없어서 이후 그 음담패설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40여 년 만에 처음 만났지만 아마 교직생활을 하는 내내 그의 행동은 저속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2024. 2. 25.
어떤 유언 가난에다 흉년마저 겹쳐 마당쇠를 내보낸 늙은 선비가 손수 땔감을 구하러 톱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글만 읽고 나무라곤 해보지 않은 이 선비, 욕심은 있어서 굵은 나뭇가지를 골라 베는데 걸터앉은 가지의 안쪽을 설겅설겅 톱질한 것이다. 떨어질밖에.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돈이 없어서 의원도 못 부른 채 저절로 낫기만 기다리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맡에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던 자서제질(子胥弟姪)에게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느니라. 혹여 나무를 베더라도 제 앉은 가질랑은 절대로 베어선 안 되느니라. 알아들었느냐?" [출처 : 지례마을] 군소리 고금에 유언치고 이보다 더 교훈적인 것도 드물 줄 안다. 세상 살며 제일 조심하고 삼갈 것이 바로 '제 앉은 가.. 2024. 2. 22.
"자네 말이 참말인가?" 김원길 시인의 책《안동의 해학》에서 「자네 말이 참말인가?」라는 글을 읽고 옛 생각이 나서 한참 앉아 있었다. 지나고 나니까 참 좋은 날들이었다. 구봉이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것은 꼭히 얼굴의 곰보 자국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짚신도 짝이 있다고 드디어 동갑 또래 노처녀에게 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길 좋아하던 구봉이가 장가를 가고부터는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이다. 전엔 제일 늦게까지 술자리를 못 떴는데 요즘은 술도 끊고 화투를 치다 말고는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아예 초저녁부터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짓궂은 명출이가 화투장을 돌리면서 슬쩍 말했다. "오늘 장터에 갔다가 들었는데 예안 주재소 순사가 여자하고 너무 붙어 지내는 사람은 일일이 .. 2024. 1. 31.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지례예술촌 2012 해와 달 선비 한 사람이 해질녘에 어느 시골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떠꺼머리총각 둘이 신작로 복판에서 왁자지껄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가자 "자, 그럼 우리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하는 것이다. "보래요, 우리가 내기를 했는데요.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이껴, 달이껴?" 서녘 하늘엔 둥근 해가 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벌개서 달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보름달이 서쪽에서 뜰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장난기가 동한 이 선비는 두 총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왈, "글쎄,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네." '숙맥열전(菽麥列傳)' 중 한 편이다. 이런 이야기 109편이 안동을 위한 변명, 숙맥열전, 개화백태, 안동 그 낯선 .. 2024.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