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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재삼7

다시 태어나면 교사가 되지 않겠다는 선생님을 생각함 (2023.5.26)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다시 태어나도 교사가 되겠다고 하셨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선생님! 그런 줄 알면서도 정작 "다시 태어나면 결코 교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는 기사를 읽으며 쓸쓸하고 허전했습니다. 다시 태어날 리 없다는 걸 염두에 두신 걸까요? 우스개 같지만 정작 다시 태어나게 되면 그때 결정하기로 하고 이번 생에서는 속상하게 하는 아이들, 학부모들, 걸핏하면 섭섭하게 하는 행정가들 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대답하신 건 아니었을까요? 교사 생활이 쉬울 리 없지요. 누군들 짐작하지 못할까요. 말하기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알죠. 하필이면 행정가들은 잘 모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도 맡은 일이 따로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그.. 2023. 5. 26.
미루나무 잎사귀에 매달린 내 눈물 나는 늘 혼자였습니다. 미루나무가 하늘 높이 솟은 방둑으로 소를 먹이며 가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물이 들판 가운데를 거쳐 그곳을 지나가는 방둑은 깎아 세운 절벽 같았습니다. 방둑 양쪽 논은 임자가 다르니까 누가 그 방둑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겠습니까? 그 아슬아슬한 길의 양쪽으로 소가 좋아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소는 정신없이 먹고 있었습니다. 그 소를 바라보며 어린 나는 잠깐 흐뭇했을 것입니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엇! 저 멀리 뒷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 흰옷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아, 이런! 내가 소를 몰고 들어가 있는 방둑은 우리 ○○부네 논이고, 대머리가 반질반질한 우리 ○○부는 소가 들.. 2020. 12. 28.
「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2012. 2. 20.
박재삼 「머석과 거석」 '참 거시기하다' 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 얼굴 한번 쳐다보고 말면 그만인 일이긴 하지만 심각한 논의를 하거나 그런 논의로써 뭘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속 터지는 경험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런 표현이 역시 오묘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몸이 좀 괜찮다 싶은 어느 주말, 누구네 혼사로 자연스럽게 모였다가 헤어지는 전철 안에서 교육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사람이 역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어느 분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퇴임 후에 무슨 종교에 관한 일을 열성적으로 하다가 병들어 사망했다면서 그랬습니다. "그분은 평소에도 워낙 저-기한(저어기한) 분이었잖아요." '저-기한 분' '저-기하다'? 그가 지금도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게 이젠 신기하게 느껴지지.. 2010. 11. 22.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江」 지금까지 시집은 12권을 냈다. 그 중에서 뽑은 것이지만, 어쩐지 그 수확이 변변찮다. 결국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이 길의 허망함만 느낄 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또다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들메를 고칠 수밖에는 없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내 초라한 주머니가 조금은 넉넉해지기를 바란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朴在森 시인은 시집 『울음이 타는 가을江』(미래사, 1996, 1판8쇄)에 그렇게 썼습니다. 그 시집은 1991년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에 제15시집 『다시 그리움으로』를 냈고, 1997년 6월 8일, 삼천포가 고향이지만 사실은 1933년 일본 동경 변두리 어느 곳에서 태어난 그는 10여 년의 투병생활 끝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 2009. 10. 9.
신념의 표상(表象) ‘자신이 “발견되지 않은 지식인”이며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는 사춘기 소년의 비틀리고 익살맞은 일기’라고 소개된, 스우 타운센드의『비밀일기』(김영사, 1986)라는 번역본 소설의 첫머리에는 1월 1일 새해의 결심 여덟 가지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1. 길을 건너는 장님을 보면 꼭 도와주겠다. 2. 바지는 벗어서 꼭 걸어두겠다. 3. 레코드를 듣고 나면 반드시 판을 껍데기에 집어넣어 두겠다. 4. 담배는 절대 배우지 않겠다. 5. 여드름을 절대 짜지 않겠다. 6. 개한테 더욱 친절히 대해 주겠다. 7.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돕겠다. 8. 어젯밤 아래층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을 덧붙이기로 했다. 이처럼 옆에 두거나 써놓고 그것만 바라보면 ‘아!’ 하고 새로운 각.. 2007. 12. 10.
마지막 편지 ⑴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99 마지막 편지 ⑴ 우리는 구름에게, 그 덧없는 풍부함에 대해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할까? - 정현종,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읽기」(현대문학, 2007년 7월호)에서 - 이제 마지막 편지입니다. 2학기 시업식을 마치고 현관이나 복도에서, 교실에서 '고물고물' 아이들이 오고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화창한 날의 바지런한 개미 떼 혹은 외포리 그 해안의 자유로운 갈매기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선 위에 모여 앉아 재재거리는 새떼처럼 정다운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무얼 그렇게 즐거워할까요, 저는 가야 하는데……. 이 더위가 물러가면 곧 저 '해오름길'의 가로수나 교정의 활엽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다시 다른 고운 빛깔로 그 싱그러움을 바꾸어가겠지요. 그러고 보니 새로 심은 .. 2007.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