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만남5

늙으면 왜 지겨운 사람이 될까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어서일까, 교육부에 들어가 맨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인 C가 찾아오겠다며 '쐬주 한 잔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달라고 했다. 모처럼 만나면 어색할까봐 그랬겠지, 우리가 다 아는 사람 둘을 대며 함께 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네 명이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이 자리를 마련한 그에게 감사 인사 겸 근황을 묻고 싶었는데, 교육부 근무 기간이 겨우 2년 정도였지 싶은 O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제는' '이제는' 하며 우리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지만 그는 아예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누가 서두만 꺼냈다 하면 말도 끝내기 전에 그가 얼른 받아서 늙으면 뼈를 조심해야 하고, 근육은 한번 생기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간다느니, 인대는 구조가 어떻.. 2023. 5. 7.
눈부신 만남 1992년~1996년 사이에 제겐 눈부신 만남의 순간이 일어났습니다. 첫 발령받은 병아리 교사에게 학교란 얼마나 미로 같은 지, 무형의 교육 현장은 또 얼마나 헤매게 하는지 우왕좌왕! 갈팡질팡! 시계가 도는지, 제가 도는지 알지 못한 시간들이 흐를 때 대선배님 한 분이 나타나셨죠. 지금도 변함없는 웃음을 그때도 얼굴 가득 띄우시고, 지금도 따뜻한 그 음성을 그때 역시 한 톤도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으신 채 "괜찮아요." "~~~ 하면 되지요." "아이들은 옳아요." "아이들이 예쁘죠?" "아이들이 대단하죠?"......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주셨죠. 교사와 아이들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까지 사랑하는 사이임을 일깨워주시려던 것임을...... 20년 경력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 2022. 3. 22.
앨리스 먼로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2021. 11. 28.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Ⅳ - 만남, 그리움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부분입니다. 질베르트의 출현과 산사꽃 …(전략)… 생울타리 틈으로 정원 안의 오솔길이 하나 보였는데 그 길가에 피어난 재스민, 팬지, 마편초 사이로 꽃무들이 열어 보이고 있는 신선한 주머니는 옛 코르도바산 가죽으로 지은 향긋하고 빛바랜 장밋빛인데, 한편 자갈 위에는 초록색의 물 호스가 풀어져서 길게 뻗어 있고 그 뚫어진 구멍들에서 꽃잎들 머리 위에 다채로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나와 프리즘 같은 수직의 부채를 만들어 세우며 꽃향기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어떤 환영이 나타나서 단지 우리의 시선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지각을 요구하고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손아귀에 넣어버렸.. 2009. 12. 23.
어느 독자 Ⅱ - 지금 교실에 계신 선생님께 - 시업식입니다. 아울러 새로 오신 선생님들이 인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쌀쌀하지만 운동장에는 작은 떨림이 있습니다. 짐짓 무표정하게 새로 만난 아이들 곁을 지나쳤습니다.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데?" 그 또래 평균치보다 약간 작은 녀석이 아예 내놓고 이야기합니다. 못들은 체하고 지나칩니다. '만만치 않은데. 저 아이와는 올 일 년 특별한 만남이 되겠는 걸.' 아이들은 새로 오신 선생님들의 인사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담임이 된 저를 탐색하느라 흘끔거리는데 시간을 소비합니다(누가 이렇게 쳐다봐 주겠습니까). 더러는 만족하는 것 같기도 하고(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애써 무관해하는 것 같은 표정도 엿보입니다(이미 정해진 담임, 실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4학년쯤 되면 알 법도 하겠지요). 추운데.. 2009.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