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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가와바타 야스나리6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2009 잠자는 미녀의 집은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절벽 위 숲 속에 있었다.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신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아가씨를 깨우려 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깨우려고 하셔도 결코 깨지 않을 테니까요. 아가씨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리하는 여자가 제시하는 규칙이다. '안심할 수 있는 손님'만 출입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여자를 여자로서 다룰 수 없는 노인들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67세의 에구치는 다섯 차례에 걸쳐 그 집을 찾아간다.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고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서 그동안 그가 만난 여성들, 여성의 아름다움, 자신의 막내딸의 일들을 회상한다... 2024. 2. 20.
가와바타 야스나리 『서정가抒情歌』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천상병 옮김* 『서정가抒情歌』 Ⅰ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서 지녔던 모습으로 살아있는 줄로 안다는 것은 더욱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식물의 운명과 인간의 운명과의 유사점을 느끼는 것이 모든 서정시(抒情詩)의 영원한 제목이다―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마저도 잃어버렸고, 그뒤에 계속되는 구절도 모르고 이 말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이란 다만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만이 그 뜻인지, 보다 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는지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불교의 여러 경문(經文)을 비길 데 없이 귀중한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요즈음의 저는, 지금 이렇게 해서 고인(故人)이 된 당.. 2016. 3. 3.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소리』 신현섭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Ⅰ 싱고 부부는 아들 슈이치 부부와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바람을 피우는데 딸 후사코마저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사위 아이하라가 마약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건 며느리 기쿠코가 낙태를 한 일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슈이치에 대한 복수 같습니다. 싱고는 고독합니다. 인생관이 자신과 다른 아들 슈이치와의 관계도 그렇지만 아내 야스코도 싱고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싱고 자신도 동경했던 연상의 여인이 죽자 그녀의 동생 야스코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고 야스코도 사실은 미남인 형부를 사랑했었습니다. 언니가 죽자 당장 형부와 살고 싶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런 감정을 감추고 살아왔습니다... 2015. 12.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2 이 찬란한 여름에 설국(雪國)'이라니! 둘러댈 이유를 찾아볼까 싶었지만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밖에는 없습니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석박사 학위논문 계획 발표회에서 사창가 여성들의 이동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하던 학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는 사창가 여성을 구경한 적이나 있을까 싶은, 남성의 특징을 고루 구비하고 있기나 한지 확인해보고 싶을 만큼 '얌전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조사하겠다는 건지…… 이젠 그 학자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를 파헤쳐 발표하는 표정은 심각하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는 불분명한, 한심한 학자가 아니면 좋을 것입니다. ♬ 이 사랑 이.. 2014. 9. 1.
열차 옆자리의 미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雪國』은 이렇게 시작되고, 그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14, 1판51쇄, 10~11).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 2014. 4. 16.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掌篇小說》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잠버릇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 같은 통증에 깜짝 놀라, 그녀는 세 번 네 번씩 잠이 깼다. 그렇지만 검은 머리 타래가 애인의 목에 휘감겨 있는 걸 알고는,"이렇게 머리가 길어졌어요. 그렇게 하고 잠들면, 정말로 머리카락이 잘 자라요"라는, 내일 아침의 인사말을 떠올리고 미소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자는 건 싫어. 어쨰서 우리까지 잠을 자야만 해?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잠을 자다니" 하고 그녀는 그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무렵, 신기하다는 듯 말하곤 했다."잠을 자니까 인간은 사랑도 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지. 결코 잠자지 않는 사랑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섭군. 악마의 짓이야.""거짓말. 우리도 처음엔.. 2011.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