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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by 답설재 2011. 7. 5.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掌篇小說》

유숙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0

 

 

 

 

 

 

잠버릇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 같은 통증에 깜짝 놀라, 그녀는 세 번 네 번씩 잠이 깼다. 그렇지만 검은 머리 타래가 애인의 목에 휘감겨 있는 걸 알고는,

  "이렇게 머리가 길어졌어요. 그렇게 하고 잠들면, 정말로 머리카락이 잘 자라요"라는, 내일 아침의 인사말을 떠올리고 미소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자는 건 싫어. 어쨰서 우리까지 잠을 자야만 해?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잠을 자다니" 하고 그녀는 그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무렵, 신기하다는 듯 말하곤 했다.

  "잠을 자니까 인간은 사랑도 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지. 결코 잠자지 않는 사랑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섭군. 악마의 짓이야."

  "거짓말. 우리도 처음엔 잠을 자지 않았잖아. 잠만큼 이기적인 건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잠들면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팔을 뺐다. 그녀도 그의 어디를 끌어안고 있어도, 문득 눈을 떠보면 팔 힘이 풀어져 있었다.

  "그렇담, 머리카락을 탱탱하게 당신 팔에 감고, 꽉 잡아요."

  그리고 그녀는 팔에 그의 소맷자락을 탱탱하게 감고 꽉 잡았으나, 역시 잠은 손가락 힘을 빼앗고 말았다.

  "좋아요. 옛사람들 말대로 여자의 머리카락 동아줄로 당신을 묶어버릴 테야" 하고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 타래를 만들어 그걸 그의 목에 걸어놓았다.

  하지만 그날 아침 인사에도 그는 비웃기만 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기는커녕, 엉망진창 뒤엉켜 빗살도 안 내려가는 주제에."

 

  이러한 일들도 세월이 잊게 해 주었다. 그녀는 그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잠들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잠이 꺠어보면, 그녀의 팔은 어김없이 그에게 가 있었다. 그의 팔은 그녀에게 가 있었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졌을 즈음, 그렇게 하는 것이 두 사람의 잠버릇이 되어 있었다.

 

                                                                                                                                       (192~193쪽)

 

 

 

 

  이것이 '손바닥 소설(掌篇小說)'이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쉬운 마음으로 얘기하면, 소설에는 장편(長篇)도 있고, 단편(短篇)도 있다. 또 중편(中篇)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고, 『삼국지』나 『토지』 같은, 도저히 한 권으로 제본할 수가 없는 대하소설(大河小說)도 있다. 헤밍웨이가 써서 풀리쳐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노인과 바다』는 길이로 보면 '중편'에 가까운데 아무도 중편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장편이라고들 한다. 『노인과 바다』, 스케일이 큰 소설이기 때문일까?

 

  『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산의 소리』라는 소설은 평론에는 많이 등장하는 작품인데도 번역본을 찾을 수가 없다), 만년에 자택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쓴 이 소설들은 단편보다 더 짧은 '장편(손바닥) 소설'이다.

  서점에서 발견하고 다짜고짜 구입해 왔다. 긴 책을 읽을 용기가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300페이지로 판형도 작은데다 68편의 소설이 들어 있으므로 다른 소설 한 권을 읽는 시간에 68편이나 되는 소설을 읽는 셈이 될 테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은 것이 이 책을 구입해다 놓은지 거의 일 년이나 됐고, 책을 집어든 것이 열 번도 넘는데 이제 겨우 끝을 봤다. 손바닥만 한 소설들이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을 더 길게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마다 시를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부분적인 표현도 모두 그렇다. 시적(詩的)이다. 그 서정성 때문에 생각 좀 하며 읽으려면 더욱 그렇다. 때로는 김유정의 『봄봄』에 들어 있는 작품들을 읽을 때의 느낌도 있다. 이야기들도 그렇고, 부분적으로도 그렇다.

 

 

  요시코가 아침 식사 설거지를 하러 부엌에 들어서자, 언치새는 이웃집 지붕에서 울고 있었다.

  뒤뜰에는 밤나무 한 그루와 감나무 두세 그루가 있다. 그 나무를 보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거진 잎사귀들이 배경에 없다면 보이지 않을 비다.

  언치새는 밤나무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낮게 땅바닥을 스치며 날아올랐나 싶었는데,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왔다. 연신 울어댄다.

                                                                                                                                       (242쪽, 「언치새」 중에서)

 

 

  두 사람은 어깨를 부대끼며 잠자리옥을 배열하는 궁리에 시간을 잊고 밤이 깊었다.

  "바깥에 뭔가 걸어다니는 소리 안 나요?" 하고 유키코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낙엽 소리였다. 이 집 지붕이 아니라 뒤뜰 사랑채 지붕에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바람이 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유키코가 기치로를 불렀다.

  "와봐요, 어서 와봐요…… 뒤뜰 노인 분들이 소리개를 키우고 있어요. 소리개가 함께 밥을 먹고 있어요."

  기치로가 일어나 가보니 화창한 늦가을 날, 사랑채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다실에 비쳐드는 햇살 속에서 노인 부부가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랑채는 안채의 뒤뜰에서 약간 높다랗고 그 사이에 나지막한 산다화 울타리가 있었다. 산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사랑채는 그 꽃 저편에 떠 있는 듯 보였다. 양옆과 뒤로 야트막한 산의 곱게 물든 잡목에 파묻힐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산다화에도 잡목의 단풍에도 깊어진 가을의 아침 햇살이 비추어, 그 빛은 구석구석 따뜻이 덥혀주는 것 같았다.

                                                                                                                                       (267~268쪽, 「이웃」 중에서)  

 

 

 

  그러므로 아무리 손바닥만 한 소설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하더라도, 이야기가 시(詩) 같고, 표현도 상징적, 감각적이어서 아무래도 빨리 읽어치우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는, 오늘은 어제와 달라서 이제 컴퓨터를 켜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어디서든 스마트폰을 들고 그걸 들여다보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소설도 장편이나 단편보다는 '손바닥 소설'이 좋겠다"며 이 책을 권할 수 있겠구나, 짐작하면 아예 착각이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무얼 좀 더 많이 읽으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제발 자신이 그런 주제넘은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괜한 걱정, 건방진 생각, '웃기를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바닥 소설 하나 더.

 

 

 

눈썹

 

 

  여자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직업을 가질 바에는 그녀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화장이 금지되어 있는 직업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를 가까이 부른 감독은,

  "넌 눈썹을 그렸구나."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쭈뼛쭈뼛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썹을 문질러 보였다.

  "눈썹을 밀어 모양을 낸 거겠지."

  "아니에요, 원래 제 눈썹 그대로예요" 하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음. 아무튼 그 정도로 아름다운 눈썹이라면 이런 데서 일 한 해도 먹고 살 수 있겠지."

  감독은 해고할 핑계를 그녀의 눈썹에서 찾아냈다. 그녀는 제 눈썹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분명히 알았다. 그것은 직업을 잃은 슬픔을 잊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었다. 자신에게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그녀는 결혼할 자신이 생겼다.

  남편은 눈썹이 아름답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등이, 그리고 무릎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에 너무나 여러 군데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냥 행복에 겨웠다.

  하지만 남편이 그녀 몸의 아름다움을 샅샅이 죄다 찾아냈을 때 어떻게 될 건지를 생각하면, 자신에게 무엇 하나 아름다움이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을 당시의 편안함이 어쩐지 점점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219~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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