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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열차 옆자리의 미인

by 답설재 2014. 4. 16.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雪國』은 이렇게 시작되고, 그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설국』 민음사, 2014, 1판51쇄, 10~11).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까지 그 거울은 없었다.  처녀의 한쪽 눈만은 참으로 기묘하게 아름다웠으나, 시마무라는 얼굴을 창에 갖다 대더니 마치 해질녘의 풍경을 내다보려는 여행자인 양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손바닥으로 유리를 문질렀다.

 

 

1

 

 

"제 옆자리에는 왜 미인이 앉지 않는 거죠? 옆자리의 기적은 없는 겁니까?"

 

KTX를 타면 좌석 앞주머니의 간행물들을 살펴봅니다. 이달의 KTX 매거진에서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매거진 편집진의 응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KTX, 그것이 알고 싶다」). 그 이유는 바로 위의 질문 때문이었지만, 그 외에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 주말마다 차를 타려니까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 서울에서 부산 가는 비행기 티켓이나 KTX 요금이나 비슷비슷하다. KTX 요금, 누가 정한 건가?
  •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자리는 어딘가?
  • 정전 시에도 KTX는 운행 되나?
  • 스낵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가 뭔가?
  • 좌석 중 '편한 대화'라는 건 어떤 좌석인가?
  • 모든 열차에서 18호차는 자유석인가?
  • 소셜커머스로 사면 뭐든 싸지던데, KTX는 그런 방법이 없나?
  • 역 플랫폼 바닥에 표기된 차량 정차 위치에 정확하게 서도록 하는 자동 장치가 있나?
  • 음, 저… 저기… 화장실 거시기는 어떻게 처리하나?
  • 시네마객실 영화 선정 기준은?
  • 응급 상황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곳은 어떤 좌석인가?
  • 커플 인증을 통한 장거리 연애용 티켓을 판매할 생각은 없나?
  • 스낵카는 언제 오나?
  • 배터리 충전은 어떻게 하나?
  • 가방을 놓고 내리면 어떻게 하나?
  • 자동차는 전 좌석에서 안전벨트를 착용하는데, KTX에는 왜 없나?
  • 단 한 장의 티켓도 팔리지 않을 경우, 해당 KTX는 예정대로 출발하나?
  • 우리나라 최고의 기관사는 누구인가?
  • 기장은 옷이 다르다. 재킷 소매와 모자에 두른 노란색, 연두색, 초록색 띠의 의미는?그걸 못하게 하니까, 드디어 주눅이 들고, 바보처럼 굴게 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을 쳐다보게 되고, '대화' '타협' '토론' 그런 것에는 영 어색해하고, 그렇지만 속으로는 울분이 쌓여서 성인이 되면 폭발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만약, 학생들이 저렇게 다양한 질문을 하면, 교사들은 그 하나하나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교사가 왜 그 질문에 답해야 합니까? 그건 당연히 그 학생들의 몫입니다."
  • 학생들은 KTX 매거진의 편집진처럼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창의적으로, 재치있게, 정확하게, ……

 

질문 중에는 누구나 궁금해 할 만한 보편적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 이런 것도 질문했구나!' 싶은 것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곳은 어떤 좌석인가?"와 같은 질문은 신선하기도 해서, 학생들에게 마음 놓고 질문해도 좋다고 하면, 우리의 저 학생들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롭고 다양한 질문들을 하게 될까 싶었습니다.

 

 

2

 

 

만약, 학생들이 저렇게 다양한 질문을 하면, 교사들은 그 하나하나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3

 

 

"제 옆자리에는 왜 미인이 앉지 않는 거죠? 옆자리의 기적은 없는 겁니까?"

아, 아쉽네요.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KTX매거진> 편집부 기자들이라도 출동했을 텐데요.(웃음) 그런데 직접 고르신 좌석이 아닌가요? 날짜와 시각을 선택해 랜덤으롤 좌석을 배정받은 거라면 일반적으로는 가운데 좌석부터 배치한다고 하네요. 짐작해 보건대 미인들은 볕이 좋은 곳에서 찍는 '셀카'를 좋아하니 아무래도 창가 좌석을 선호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통로 좌석을 노려 보는 게 어떨까요? 물론 여자 친구의 좌석까지 직접 두 자리를 예약하시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겠네요. 파이팅!

 

 

4

 

 

우스개 좀 해도 좋다면, 옆자리에 미녀가 앉아 있으면 큰 손해가 납니다. 그쪽을 바라볼 수가 없게 되어 목이 뻣뻣해지고, 책을 읽어도 뜻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러니까 모처럼의 여행을 망쳐 버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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