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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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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오전 10시 그 시각에 나는 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정각 열 시가 되자 사이렌이 울렸다.그러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하는 것이었다.묵념은 1분간 계속되었다.나는 주제넘긴 하지만 이 나라는 썩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일찍이(19세기말) 좀 더럽고 비위생적이긴 하다면서도 이 나라를 사랑하여 여러 번 여행하고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그 책에 이렇게 써놓았다.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 2025. 6. 8.
'스카보로'를 찾으려고 또 읽은 소설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 소설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J. L. 카)은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데 단어들, 문장이나 문단에 눈길이 머물고 싶어 해서 보름이 걸려 읽었고, 읽고 싶은 책이 수두룩해서 그럴 형편이 아닌데도 바로 또 한 번 읽었다.'스카보로' 때문이었다. 스카보로라는 지명이 나왔고, 분명히 그걸 의식했는데 거의 다 읽었을 때쯤 그 생각이 나서 앞으로 뒤로, 다시 앞으로 뒤로 여러 번 훑어봐도 찾을 수가 없었고, 이런 일은,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읽고 찾자'고 미뤄봤자 별 수 없고 늘 포기나 다름없어서 아예 당장 한 번 더 읽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마음 편하게 읽는데도 '스카보로'가 스스로 눈에 띄었고, 처음 읽을 때는 '이게 무슨 소리일까?' 싶었던 부분이 명료해지거나 지나쳐 읽었던 부분이.. 2025. 6. 5.
나는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노인이 되어가며 외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이렇게 글로 쓰긴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걸 말하나 하지 않으나 끝은 끝이지만 그렇게 말해버리면 정말로 '끝일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뻔한 것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어도 나는 묻거나 하지 않는다. 상대방은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사는 날까지는 그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고 살아보자는 생각일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외로울 땐 누구에게든 전화를 하지 않는다.전화가 오면 가벼이, 즐겁게 대하고 즉흥적으로 가볍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한다. 내 심경을 그대로 알리진 않는다. 나는 외롭긴 하지만 본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2025. 6. 4.
이것은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여기는 우리 아파트 피트니스센터 양쪽 출입문 사이다.아파트를 지을 때 멋지게 치장하려고 가슴 높이로 예쁜 돌들을 깔아놓았다. 혹 바닥에 저 돌들을 깐 멋진 수족관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위험하다는 결론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예쁜 돌을 구입하는 데도 돈이 제법 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돌을 찾으려고 저기 올라간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반가운 일은, 처음 두어 해는 잠잠했는데 차츰 풀이 솟아오르더니 해가 갈수록 풀의 종류와 양이 많아지고 있다.나는 마음속으로 그 풀들을 응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풀보다 돌이 더 많이 보였는데 올해는 저쪽 편으로는 돌보다 풀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면 섭섭하다고 할 풀들이 많겠지만, 지난해까지는 민들레가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 2025. 6. 2.
숙제를 없애겠다고 약속해버린 대통령 (2025.5.30) 특별한 사유가 없는 어린이날에는 대통령이 어린이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벌여왔다. 초청 받는 어린이가 몇 명 되지 않아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뉴스 시간의 행사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했다. 언젠가 어린이들과 대통령 간의 대담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린이들이 질문하고 대통령이 대답해주는 형식이었다. 좋아했던 공부, 존경하는 인물, 평소 하는 일, 즐겨 읽는 책 같은 것들을 물어서 질문이나 대답이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연 한 어린이가 매일 숙제를 내주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 수가 없다면서 숙제 좀 내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어떻게 저 질문이 나오게 되었을까 의아했다. 당연히 사전에 어떤 걸 물을지 생각해보라고 했을 것이고 누군가 예상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2025. 5. 30.
다른 사람 블로그 찾아다니기 올해 들어 다른 사람 블로그를 찾아다니는 일이 번거롭게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고지식하다.누가 와서 댓글을 달아주면 넘어가버린다. 그 사람이 새 글을 올릴 때마다 경탄의 표시를 해줘야 한다.올해 들어 그게 번거롭게 느껴져서 검색해 봤더니 상대방은 그렇게 다녀간 뒤로는 '아예' 오지도 않는데 나는 '아주' 목을 매어놓고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가서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댓글을 달았을 때 상대방도 즉시 내게 와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아주는 건 뭐랄까 너무 실리적·현실적인 처사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사람은 차라리 체면이 있는 사람, 고마운 사람이었다.대부분 그렇게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미끼만 던져 놓고 물면 그다음부터는 나는 부지런히 달려가고 상대방은 아예 오지 않거나 잘해봤자 내가.. 2025. 5. 28.
스카브로, 숲 같은 서재, 자욱한 정원을 찾아 다시 읽어야 할 책들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J. L. 카)은 겨우 260쪽 정도인데 읽기 시작한 지 보름이 가깝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게 되었다. '스카브로'라는 지명 때문이다. 문득 이 지명이 생각나서 어디에 어떻게 나왔는지 저녁에 읽은 부분을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다 읽고 나서 시간을 내어 다시 읽어야 한다.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은 참 좋은 소설이다.그렇지만 읽고 있으면 꿈꾸는 것 같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10여 년 전이었지? 진주 공항에서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그 책을 읽다가 문득 마지막 주요 등장인물의 서재에 대한 설명을 다시 읽고 싶어서 앞으로 뒤로, 다시 앞으로 뒤로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언제든 그 부분을 찾아야 한다.두.. 2025. 5. 27.
법령의 힘! 그때 어려운 일이 참 많았는데 자신이 나서서 다 해결했다고 자랑질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그런다고 이제 와서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다. 지나간 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잊힌다. 다 잊힌다. 사람이나 일이나 다 잊힌다. 제7차 교육과정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극렬히 반대하고 나서자 차츰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어? 어? 하는 사이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마저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심지어 한국교육개발원에서 그 교육과정(안)을 연구해서 교육부에 보고한 학자들조차 언론 인터뷰를 통해 문제점이 많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월급 받고 연구비 받으며 일해 놓고는 "연구가 잘못되었다"고 자백하는 건 마치 아이 낳아놓고는 스스로 잘못 낳았다고 비난하는 꼴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 2025. 5. 25.
아름다움을 향한 눈물겨운 노력 산책로에는 눈길을 따라 어디든 아름다움이 있다. 다가오고 멀어져 가는 풍경, 오가는 사람들, 작은 공원, 시냇물, 돌다리, 그 옆으로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 백로, 어느 것이든 마음대로 자라고 꽃피우는 언덕, 가로수......전신주를 세운 곳, 출입문 옆, 담벼락과 아스팔트 사이의 틈, 굳이 흙도 없을 것 같은 곳에 마련한 호리(毫釐) 같은 꽃밭도 정갈한 것만 골라서 올린 '성찬' 같아서 나더러 달리 한번 구상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다.이런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화가는 일생을 걸고 있겠지?그러므로 가망 없을 듯한 작품은 눈물겹다. 하필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고 변명하면 우선 아름다움부터 보여달라고 하기가 민망하고 대답해야 할 이의 입장이 남의 일 같지 않을 듯한 것이다.자연은 몇십 .. 2025. 5. 22.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김선형 옮김, 글항아리 2024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오랜 세월 내가 줄곧 문학책만 읽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12) 명사의 '독서 체험기' 혹은 '독서 지침서'라고 하면 될 것 같았다.독서에 대한 책이라고 해봐야 장황하게 내용을 소개하거나 현학적으로 해석하여 아는 체한 기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혹독하게 신랄하게, 그렇게 쓴 평론은 봤어도 그렇게 쓴 책을 재.. 2025. 5. 21.
딱 한 번뿐이었던, 빛나는 아침 요즘은 새벽 다섯 시에 잠이 깬다.대단한 일은 아니다. 저녁형 인간이어서 밤 열두 시경에 잠자리에 드는 걸 생각하면 늙어가면서 수면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서글플 뿐이다.또 젊었던 시절에도 여섯 시간이면 충분했고 나폴레옹은 네 시간만 잤다고 하지만 언젠가 TV에 나온 한 전문가가 노인도 여덟 시간은 자야 한다고 해서 여섯 시간도 적구나 했는데 그 여섯 시간조차 무너지는가 싶기도 하다.지난 초봄까지만 해도 여섯 시에 일어났었다.그러면서 여섯 시는 넘기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아내 때문이다. 늦게까지 뭘 좀 읽고 있으면 자다가 깬 아내가 일쑤 '그만 좀 자라'고 했다. 아내는 나와 달리 아침형 인간이어서 초저녁에 잠이 들고 새벽 3~4시에 잠이 깨는데 내가 저녁 늦게까지 부스럭거리면 수면에 방해가 되기도.. 2025. 5. 19.
바나나 한 손 / 박소란 바나나를 먹었다아침으로도 먹고 저녁으로도 먹었다 달고 부드러운,살이 되고 피가 되겠네그럴수록바나나는 조금 아파 보인다 줄기를 벤 부위에 꾀죄죄하게 피가 말라 있는 게 보인다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을 피를 바지춤에다 슥슥 문질러 닦은 것같이 보인다반창고도 하나 없이 짙은 흉터가 남을 것이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바나나 뭉텅이, 바나나 응어리, 하기도 했지만 바나나 한 손 a hand of banana영어에서는 바나나를 손에 비유한다는데바나나를 먹기 위해서는 그 손을 잡아야 하겠네 손을 잡은 뒤에는, 뒤에는 다시 놓으면 된다다시 먹으면 된다 바나나 한 손을 검색하자 매끈한 모형 과일이 쏟아져 나오고이런 건 언제 어디다 쓰는 걸까알 수 없지만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 외로워 보인다서글퍼 보인다, 가끔은 진짜처럼.. 2025.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