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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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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희 '안개' 안개의 도시였습니다. 가망 없다는 느낌인데도 다른 길은 없어서 학교나 다녔고, 더러는 아무도 몰래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가 낮에 함께 공부하던 이성을 만났습니다. 안개 때문에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고 만나서 무얼 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녀 정훈희의 '안개'가 저녁마다 거리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 노래는 누가 어디서 누구와 만나 어떤 얘기를 하는지 샅샅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가망 없다는 느낌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그 '안개'가 휩쓸고 지나가는 바로 그 거리를 끝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내게 다가온 사람들은 내가 가망 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런 기대나 희망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느낌으로 하나씩 하나씩 멀어져 가버렸고 .. 2022. 11. 20.
영화 《내 아내의 외출》 타라는 남편인 마크와 딸 플로리, 아들 테드가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마크는 매일 아침 깨어나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만, 타라는 가만히 견딜 뿐이다. 아침 식사를 차려주어도 아이들은 먹는 둥 마는 둥, 아이들의 식사와 등하교를 도와주는 건 타라지만 아이들은 재미있는 아빠만 좋아한다. 타라의 우울감을 느낀 마크는 그녀를 달래 보기도 하지만 욱하는 성격에 폭언과 말실수를 하고, 타라는 엄마를 찾아가 상담해보지만 엄마는 그저 지나가는 한 때라고 일축한다. 타라는 멀리 나가 길거리를 구경하고, “여인과 일각수”에 관한 책을 사며 바깥 활동을 해보려던 것도 잠시, 아이들 앞에서 욕하는 마크를 보고는 홧김에 집을 나와 버린다. (DAUM 영화 '주요 정보'에서) 타라는 아무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외로워 보인다고.. 2022. 11. 18.
아름다움과 슬픔 : 알퐁스 도데 《아를라탕의 보물》 알퐁스 도데 Alphonse Daudt 《아를라탕의 보물》 《현대문학》 2022년 10월호 양치기들이 부른 수천 마리의 양들이 양치기 개들에게 쫓기어 우리로 바삐 가고 있었다. 곱슬곱슬한 양털과 매에 매에 소리가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며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양치기들이 제 그림자와 더불어 양 떼 물결에 휩쓸려 가는 듯한, 그야말로 거친 파도였다. 잠시 후 어둑해진 하늘을 삼각 편대를 이룬 오리 떼가 마치 땅에 내려앉고 싶다는 듯이 아주 낮게 날아갔다. 선두에 선 오리가 문득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야생의 함성을 내지르며 다시 고도를 높였고, 오리 떼 전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는 안 보이던 오두막의 문이 막 열리고, 활활 타오르는 듯한 커다랗고 네모난 빛이 들판에 내려앉았다. 동시.. 2022. 11. 17.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게 되었다. 2022. 11. 16.
기막힌 인생 : 사이먼 윈체스터 《교수와 광인》 사이먼 윈체스터 《교수와 광인》 The Prufessor and the Madman 공경희 옮김, 세종서적 2000 불친 淸(nadeshiko)님이 지난 11월 11일(?) '오밤중'에 두 시간짜리 영화 《博士と狂人》을 보고 '비실비실'한 상태라는 얘기를 읽고 얼른 이 책을 찾았다. 어떤 책인지, 책날개에 잘 소개되어 있어 그걸 베끼기로 했다. 사이먼 윈체스트(이 책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영국 속어 사전 편찬의 권위자인 조너선 그린이 쓴 《해를 따라가기 Chasing the Sun》란 책에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자원봉사자 중에 정신병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수용된 W. C. 마이너가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짧은 내용의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19세기에.. 2022. 11. 15.
BTS "봄날" 나는 요즘 우울합니다. 우울한 날에도 늙어가긴 합니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도 시간은 갑니다. 혼자서 BTS 부산 공연 실황 중계방송을 보던 밤이 떠오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보라색 함성'이 지금도 다 그대로 "보입니다". 그때도 나는 우울 모드였는데 아, 이런...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우울했고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을밤이 그립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 때가 '가을밤'이었습니다. 그런대로 좋은 가을밤이었었습니다. '봄날'이었지요, 아마? 그들이 끝에, 개별로 이별 인사를 하기 전에, 그러니까 공연 마지막에 불러준 노래... 봄날... 그들은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면 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그 "여러분"의 한 명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022. 11. 14.
박남원 시인의 산문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시인의 집》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박 시인은 지난해 여름 시인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제 시를 다소 과하게 칭찬해주시면서 제 시집을 소개해 주셨는데 보답글 하나 없이 지내는 것도 무례라는 생각으로 몇 자 적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제 시 “내 안에 머물던 새”를 블로그에 올려주셨지요. 그런데 제 시 밑에 덧글로 적어 주셨던 지금까지 ‘상 받은 것도 없다는 시인’이라는 문구가 그때 이후 언제나 제 머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평소에 상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며 살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초등학교 2학년까지 우등상이나 개근상 몇 개 받은 것 빼고 이후로는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집 속에 “나에게 행복.. 2022. 11. 13.
내가 기다리는 곳 10~20분쯤, 길 때는 한 시간 이상일 때도 있습니다. 나는 10분도 좋고 한 시간도 괜찮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앉아 있거나 서성이거나 하는 것이 싫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기다리게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누구를 기다려 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실없는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내가 기다렸었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 정겹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도 합니다. 무덤덤하게 떠오르고 말면 좋겠습니다. 눈물 글썽이거나 풀이 죽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그 어느 것도 달갑지 않습니다. '가랑잎 정도'로 소멸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바람 부는 곳도 따뜻한 곳도 필요 없습니다. 잘 듣고 기억하는지 몰라도 그걸 바란다고 이야기해 놓았습.. 2022. 11. 11.
박물관을 찾는 이유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 본 이야기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읽다가 꼭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을 보았습니다. 그림도 내 마음에 드는 것, 왠지는 모르지만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 작품, 그렇게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작품 몇 점을 골라서 잘 보고 찬찬히 나만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정말 훌륭한 관람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약 이십 년 전 호암미술관에서 조선백자전朝鮮白磁展을 했을 때인데요. '임금희씨 병甁'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정말 아름다운 백자 병을 따로 단독장單獨欌 안에 전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중년 여성이 그만 이 병에 홀딱 반해 가지고는 거의 30분이 되도록 장을 빙빙 돌면서 영 떠나질 못하는 거예요.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분이 일단 전시장 문을 떠났다가, 아무래도 아쉬워서.. 2022. 11. 10.
문정희 「얼어붙은 발」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 2022. 11. 9.
내 글은 언제 죽을까? 지난 초여름에 "momo"라는 분과 나눈 댓글·답글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은 당대로 끝나지 않으니... 파란편지 블로그는 Daum에 영원히 남겠지요^^;;" momo님이 그렇게 썼고,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쓰는 이 글들이 DAUM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말씀에 위안을 느낍니다. 뭘 몰라서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걸핏하면 이런 매체가 없어지면 내 글도 죽음의 길을 가겠구나 합니다. ㅎ~"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블로거는 아직 한 명도 죽지 않아서(혹 죽었다 하더라도 내가 알지 못해서) 가타부타할 수가 없습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의 경우는 이렇습니다(조호근 '어느 동물원 방문의 재구성' 《현대문학》 2022년 6월호, 조명독법鳥鳴讀法 제4회, 169). 찰.. 2022. 11. 8.
나는 '꼰대'가 되어 살아가네 묻지도 않았는데 늘 먼저 '답'을 주려고 하고, 심지어 그 '답'조차 유효기간이 지났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그 사람을 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묻지도 않은 답을 들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 답 속에 섞여 있을 자신에 관한 평가나 판단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 기질은 나이 드신 분에게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오래 일했고, 많이 경험했으니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이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구범준 세바시 대표 PD 「나이 들수록 '?'가 필요해」(《○○○○○》2022.11.)에서. 사람들이 "꼰대" "꼰대" 해서 어렴풋이 나이 들어 망령이 나기 시작한 사람을 보고 그러는가 보다.. 2022.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