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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아이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네요?”

by 답설재 2007. 12. 3.

 

 

그럭저럭 살다 보니 제자들의 나이도 오십 줄이 되었습니다. ‘그따위로 가르쳐 놓았는데도 이렇게 성장했으니 미안하고도 고맙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별 것 아닌 일로도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녀석이 식당 개업을 했다기에 다른 제자와 함께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꽃집에 들렸다가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화물차를 보낼까요?”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으레 하는 농이려니 생각하면 됩니까? 저는 결국 교육자로서 일생을 마칠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이런 일로 제 아내로부터 늘 충고를 받으며 살아왔으면서도 감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속이 상했습니다. “야, 이놈아, 넌 장사를 하니까 이런 일로 어디 방문할 일이 있을 때 큰 화분을 사도 좋겠지만 나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 넌 내가 전근 다닐 때 조막만 한 화분이라도 사들고 왔나?” 하고 싶은 걸 참았습니다. 아니 속으로는 벌써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역시 속 좁은 사람이어서 별 수 없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적당한 크기의 화분을 들고 들어간 그 식당에서 늦게 결혼하여 늦둥이 아들을 둔 또 한 녀석이 제 속을 긁었습니다. 제 ‘마누라’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그렇게나 닦달한답니다. 하루는 그 녀석의 아들이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자꾸 괴롭힌다는 연락이 와서 그의 아내가 담임교사를 찾아가서 잔소리를 듣고 왔는데, 저녁에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집에서 엄마에게 당하는 걸 그 아이에게 돌려주고 있어요. 저도 스트레스를 풀 데가 있어야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곧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걸 자랑이라고 이야기할까?’ ‘나를 어떻게 보고 막 대놓고 저런 이야기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저에게 상담을 하려고 한 이야기도 아니므로 (그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를 묻고자 하는 표정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명색이 ‘스승’은 아니어도 ‘선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로서는 참 어처구니가 없는 대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화인 그 이야기는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현실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의 ‘부모’라는 사람들은 그런 현상을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며, (그런 문제를 성적이나 영어 회화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으면 손 좀 들어보십시오.) 이런 나라에서 그래도 교육자로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왜 ‘초라하다’고 느끼는지 아십니까? 그런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이른바 ‘부모’라는 사람들은 돈 버는 것에 비하면 까짓것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식전에 해결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은연중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교육문제가 자신의 사업이나 일상 업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하다고 여긴다면 그런 표정으로 그런 무게로 그처럼 큰 목소리로 - 어쩌면 의기양양하게, 어쩌면 자랑스럽게 - 공개할 리가 있을까요?

 

아이를 그렇게 다루는 그런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를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키우려는 것일까요? 또 그런 어머니들은 자신의 자녀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어떤 과정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런 여성들은 교육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과만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녀의 교육에 대하여, 자신의 자녀가 어떤 성장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겠다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자라는 대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학년 아이들이 귀가하는 어느 날 이른 오후였습니다. ‘요것들이 오늘은 뭘 배우고 돌아가는가?’ 물어보고 싶도록 귀여운 아이들입니다. 현관을 나서는 한 여자아이의 우울한 표정이 눈길을 끌어 먼저 말을 붙였습니다. “너 왜 그래?” “논술이 어려워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2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우리 학교에서는 2학년 아이들에게 “이게 논술이다!” 하고 논술을 가르치나?’ 싶었습니다. 2학년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논술을 가르치기는 해야 하지만 아이들은 지금 배우는 것이 논술인지 뭔지도 모른 채 배우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복잡한 이야기이므로 언제 다음 기회에 그 뜻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참 이상하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저를 바라보던 그 아이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엄마는 제 마음을 잘 몰라요!”

 

이제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일단 즐거웠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날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날은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막으면 무조건 우리가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공부는 시켜야 하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즐거운 가운데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 결론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아이들을 우리 마음대로 몰아가도 좋다는 권한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가 낳았고 우리가 가르치고 있지만 결코 우리의 ‘소유물’은 아니며,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가르치느냐 마느냐는 시간과 돈 혹은 누구의 권유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충분한 계획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한 계획을 바로 ‘교육과정’이라고 합니다.

 

‘교육과정’이 뭔지 모르면, 아이가 하는 대로 그냥 두는 게 차라리 더 좋은데 “○○엄마, 요즘 강남에서는 세 살만 되면 논술을 가르친대요” “1학년 때 책 1000권은 읽어야 한 대요. 그런 얘기 못 들었어요?” 하는 이웃집 ‘아줌마’(관광학에서는 오래전부터 극성스러운 우리나라 기혼 여성들을 가리키는 유명한 용어 AZUMMA)의 말에 넘어가고 맙니다.

 

추신 ①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그런 ‘아줌마’처럼 소문 좀 내주십시오. “김 교장이 그러는데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네요.” 하며. ② 재미있게 열정적으로 하는 일치고 그르치는 일은 없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공부는 더 그렇습니다. 어느 교수가 말했습니다. "재미와 열정으로 일하면 적어도 굶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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