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트라우마 같다. “교사 주제에 어디서 말대답이야” “칼 맞고 싶냐?” “골프채로 머리 때릴까?” “아이한테 지장이 있으니 임신과 결혼 미뤄주세요” “처녀죠? 애 낳아보면 알 거예요” “수능 몇 등급이었어요?” “학교에서 늦게 오면 학원 지각해요, 청소시키지 마세요” 어느 신문 연재 기사에서 본 말들이다. 다른 건 두고 “교사 주제에…”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오래전 두 번째 군사정부 시절, 그 지역 계엄사령관이 아들 전입을 시키려고 학교에 왔다. 부관이 군화를 벗어야 하는지 물었다.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렇다고 했다. 괜히 좀 두려웠는데 다행히 사령관이 얼른 군화를 벗었다. ‘후환이 있도록’이야 하겠나, 실없는 생각도 했다.
교사에게는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제 자식 사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는 명예, 자부심 같은 것만은 충분하니까 봉급이 적다고 배고파하는 꼴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살았다.
그렇지만 대학교수들을 대하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학교수가 맨 앞줄에 앉고, 그다음에는 중고등학교 교사, 또 그다음에는 초등학교 교사, 맨 뒤에 유치원 교사가 앉는 것이라는 우리 사회의 통념 같은 것 때문이었다.
그 학교엔 대학교수의 자녀가 수두룩했다. 1학년을 담임했더니 겉으로만 그랬는지 몰라도 그런 아이의 부모들도 고분고분하기만 했는데 C라는 아이만은 달랐다. (다양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좋은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C는 부모 둘 다 교수였다. 굳이 가르치려 하지 말라, 우리 아이가 틀리는 문제만 전화로 알려 달라,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아도 된다…
가르칠 것이야 없다. 이미 한글을 줄줄 읽을 수 있고 기초적인 계산을 할 줄 아는 아이이니 ‘통보’ 그대로 굳이 뭘 가르치겠나. 다만 아이는 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전혀 양보할 줄을 몰랐고 그런 일로 자주 다투었다. 1학년을 마치며 통지표 ‘종합란’에 이렇게 써주었다. “C는 하루하루 친구들을 배려하고 돕는 생활을 배워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C는 허구한 날 다툽니다. 남의 사정을 이해하지도 양보할 줄도 모릅니다” 그렇게 쓸 수는 없고 ‘TV는 사랑을 싣고’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그런 표현이 우스개가 되는 걸 볼 때마다 혹 난데없이 공개될지도 모르는 그 기록을 다행으로 여겼다. 직설적으로 쓰면, 아들이 시험문제 맞히는 게 유일한 목적이던 그 고매한 교수 부부가 좋아할 리 없고, 그렇게 에둘러 써주어도 마음만 먹으면 왜 그렇게 적었는지 담임의 의중을 짐작하고 그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C가 어떻게 성장해갔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자꾸 변해서 그걸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게 되었다. 그런데 C는 연전에 제 발로 찾아와 근황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달라졌나 싶어 잔뜩 호기심을 가졌는데 이런! 역시 ‘빈손 방문’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자랑스럽게 여의도 증권가에서 잘 나가는 직책을 가졌다고만 하고 자세한 건 밝히지 않겠다는 듯 명함 한 장 내밀지 않았다.
더구나 인사차 온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었다. 옛 담임교사가 사주는 저녁을 먹으며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결혼 이십 주년이 지났는데 아내는 저더러 배려할 줄 모른다고 불평합니다. 점점 심해져서 이제 단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통지표에 써주신 문장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는 내가 그날들의 담임으로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가르쳐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며 뭔가 묘수를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저녁도 내가 샀으니 공짜로는 안 되겠네,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나도 잔소리를 듣고 사네” 객쩍은 소리로 돌려보내며 생각했다. ‘다 때가 있네. 그때 딴사람을 보살피고 돕는 활동을 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네. 자네 부모님들은 마음대로 했고, 자네는 두고두고 괴롭고, 나는 요즘 절망할 지경이네’ 그는 옛 담임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혹 그때 그 교수 부부는 지식만은 대단하고 배려 따위는 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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