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진지도 20년이 가깝네요. 옛날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아련한 기억 속 어느 봄날,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고 거기서 두 번째 교장을 만났어요. 걸핏하면 술 냄새가 풀풀 났는데, 그러다가 공공연히 아침부터 종일 주점에서 지낸 날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불러냈을까요? 명함이 아까운 시시껄렁한 몇몇 ‘유지들’과 함께였습니다.
두어 시간 수업이 진행되었을 즈음 잠깐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고, 까짓 거 들은 척 만 척하고 있었더니 심부름꾼이 자꾸 달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봐야 했지요.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역시 ‘한 잔 마시자’고 했습니다. 수업 중 술 마신 공범을 만들자는 뻔뻔한 수작이었지요. 단숨에 한 잔 마셔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공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야 마음 편히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고 수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교실에 있어야 했고, 그 교장에겐 공범 만들기가 필요했겠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 행정실이 없었습니다. 그럼 행정업무는 누가 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교감이 했고, 경리(회계)는 제가 했습니다. 저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얼빠진 교장과 치사한 유지들이 마신 술값을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디에선가 정부에서 무상으로 배부하는 교과서 대금을 징수해 내라는 교장과 함께 근무한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참 궁색한 세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도 했지만 알면서도, 심하게 앓으면서도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지낸 세월이 지금 이 발전을 가져온 조건의 하나가 되었을까요?
학교 행정실은 왜 생겼습니까? 교장이 공범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게 해주고 싶어서였을까요? 행정직원 수를 획기적으로 확대하려고? 교육청·교육지원청의 행정명령이 잘 전파되게 하려고? 아니죠!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요.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장은 윗분인 교육장을 도와야 하고, 교육장은 교육감을 도와야 한다는 거죠. 교육감은 고도의 정책을 수립하고 전개하는 막중한 직위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그 논리대로라면 교사들은 교장을 도와주어야 하겠지요? 학생들은 교사들을 도와야 할 것이고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도대체 정책은 누굴 위해 수립하고 실현하는 것입니까? 학생들이죠! 그러니까 선거 때만 되면 교육감 후보들이 서로 학생, 학부모, 선생님들을 잘 도와주겠다고 외치는 거죠. 교육감 자신은 교장들을 잘 돕고, 교장들은 교사들을 잘 돕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잘 돕는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겠다고, 그런 정책을 수립하고 실현하겠다고, 권한 행사를 하는 데 혈안이 되는 이상한 교육감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거죠.
실장님께서 부장교사들과 밤을 새워 토론한 결과로써 만들어진 예산안을 가지고 와서 의사결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요청대로라면 예산이 두 배는 되어야 한다며 고민하면서도 결국 잘 조정해내신 거죠. 교사들이 저에게 어떤 일을 할 예산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던 관행을 부셔버리고 제가 담당교사에게 간청하는 모습을 미소로 지켜보시던 모습도 기억합니다.
교문에 걸었던 불조심 현수막 생각나시죠? 처음엔 소방서 공문대로 하면 된다고들 투덜댔지요. 굳이 전교생 대상 공모를 거쳐 2학년 아이가 낸 표어로써 만든 현수막을 걸어두었다가 곱게 접어 그 아이 어머니께 전해주셨지요. 그 어머니는 겨울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교문을 지켜보았다면서 눈물겨운 감사의 인사를 했고, 실장님은 저에게 그 감동을 실감나게 전해주셨고요.
실장님! 저는 “저희 행정실이 우리 학교 교육에 큰 구실을 하고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실장님의 ‘결론’ 한 마디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그 관점은 지금 실장님이 보다 큰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 지역 교육 관계자들이 깊이 인식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행정실장이 있어 교장으로 근무하는 하루하루가 저에게는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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