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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박완서의 밑줄

by 답설재 2026. 5. 24.

밑줄에 대해서는 소설가 박완서의 생각이 재미있고 ‘정말 그래!’ 하고 인정되는 바가 있다.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상태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밑줄 긋는 일을 기피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허영심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여학교 다닐 때는 책이 귀할 때여서 그때 읽은 대부분의 책은 빌려보았다. 달콤한 연애소설은 순번을 정하고 돌려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남들이 보던 책이니까, 특히 세계명작으로 알려진 책에서는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발견하는 수가 드물지 않았다. 남의 밑줄을 보는 게 당시의 건방기 많은 소녀에게는 은밀한 쾌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 밑줄씩이나, 유치하긴. 하는 우월감까지 먼저 읽은 동무들에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얼마나 겁쟁이인가. 남이 나를 그렇게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밑줄 같은 건 절대로 안 칠 것 따위나 신조로 삼았으니.

 

 

박완서 선생이 쓴 「내 생애의 밑줄」이란 에세이가 『현대문학』 2008년 12월호에 실렸는데, 나는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어느 날 아침, TV를 보다가 한국에서 제일가는 연예인 중 한 명이 함께한 사람들에게 책이란 밑줄을 긋는 순간 그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했고, 그러자 일동 중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는 걸 보고 "그 값어치란 것의 척도가 뭔가?" 묻고 싶은 심정, "그 가치관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같은 것인가?" 묻고 싶은 언짢음, 뭔가 억울하고 화도 좀 난다는 느낌을 가지고 이 블로그에 "밑줄 그은 책의 값어치"라는 글을 쓰고는 혼자 언짢아하고 혼자 그 언짢음을 해소하고 말았는데, 지금 박완서 선생의 글 일부를 여기에 싣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말 잊고 말아야 한다.

더구나 나는 박완서 선생은 독서교육 정책과 유니세프 일 때문에 몇 번 만났지만, 그 연예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방적으로 그가 비치는 영상을 보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언짢아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