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내 별명

by 답설재 2026. 5. 6.

출처 : korpott "피쉬 이야기" https://blog.naver.com/korpott/223944911837(부분)

 



6학년 담임선생님은 음악 수업을 하지 않았다. 전에 이미 밝혔지만 종회 때 소정의 단조로운 멜로디로 평시조를 한 수 읊고 마쳤는데 그게 일 년 내내 시행된 음악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겨울방학 때 학교 자료실에 보관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초상화를 빌려서 똑같이 그려갔을 때 웃지도 않고 "잘 그렸네" 한마디뿐이어서 좀 섭섭했는데 그렇게 좀 섭섭한 것이 평생 잊히지 않았다.

선생님 별명은 '곰백사이'였다.
나는 곰백사이가 뭔지 잘은 모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해충(害蟲)일 것이라는 짐작만 하고 있다. 어떤 것일까? 누구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이미 그 비유가 있고, 더구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선생님이니까. 선생님 성함(百洙)의 발음도 그 벌레 이름을 연상하게 해서 생김새도 선생님처럼 호리호리하고, 흐릿한 색이고, 사람을 물면 해로울 것이라는 짐작만 한 채 살아왔다.

그 짐작은 지금도 같은 상태다. 최근 만만한 에이아이(AI) 챗봇에게 물었더니 '논밭이나 습한 곳에 사는 지네나 노래기 같은 다지류' 또는 '사람을 물거나 피부에 자극을 주는 벌레류 전반(독성이 있거나 징그러운 것)'을 지칭하는 방언(方言)으로,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물리면 아프고 오래간다" "건드리면 안 되는 벌레" 등 위험하거나 꺼림칙한 벌레를 통칭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혹 생김새나 나타나는 곳(서식지)에 대한 기억이 있으면 더 정확하게 짚어줄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잘은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을 별명으로 부른 경우가 많았다.
그게 공식적인 호칭처럼 쓰였건만 세월 탓에 다 잊고 말았다.
나 자신은 남의 별명을 애용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래도 이렇게 다 잊고 만 것은 서운한 일이다.

나는 별명이 없었다.
그 '맹물' 느낌이 서운하다.

이십여 년 전 교장실 청소를 하러 왔던 아이(의사)가 붙여준 인디언식 별명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는 이름도 있지만 둘 사이의 일이니 '있으나 마나'다.
요즘은 블로그도 하고 그러면서 닉(닉네임)도 쓰게 되었고, 한때 '파란편지'라는 닉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제자들과의 일로 자의 반 타의 반 '답설재(踏雪齋)'라는 닉을 쓰고 있다.


별명다운 별명이 있을 뻔한 적은 있다.
1979년이었다. 3학년 어린애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 녀석이 내 눈꺼풀이 금붕어 같다고 했고, 몇 번 "금붕어" "금붕어" 했는데 호응도가 너무 낮아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별명이 오래 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이가 드니까 쌍꺼풀이 묻힐 지경으로 눈꺼풀은 더 내려앉았다. 운전 중에 시야를 더 확보하고 싶으면 두 눈을 부럽 뜨지만 절개수술 같은 건 아예 생각이 없다. 얼굴에 손을 대려면 저승꽃부터 너무 많고 커서 의사도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청소하듯 해봐야 주름 때문에  더 우스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늙어가면서 점점 더 금붕어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금붕어가 괜찮은 것이어서 그 '흐지부지'가 아쉽다. 금붕어는 횟감도 못 되고 매운탕에도 못 들어가는 허당인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일반 완상용으로는 괜찮고, 그 옛날 교사 시절 겨울방학 중 차가운 교실 창가에 놓아둔 초라한 어항에 얼음이 얼었는데도 녀석들이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걸 보고 신기해하고 미안해하던 일을 생각하면 그래도 생명력만은 모범인 허당이었으니 잠깐 떠오르는 듯하다 사라진 그 별명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별명이 내포하는 이미지는 누구에게나 헛것은  아닌 것 같아서 새삼 '이름 붙이기' 혹은 작명(作名)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러질 시간을 생각해 본 어버이날  (0) 2026.05.08
기이한 봄 날씨  (2) 2026.05.04
그 중학교 교장의 죄와 벌  (2) 2026.05.03
챗봇, 만물박사 (대외비!!!)  (8) 2026.05.02
9층 아주머니  (7) 2026.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