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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타이모크라틱한 인간

by 답설재 2026. 6. 8.

노예의 존재는 인정투쟁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패터슨은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플라톤을 따라 그가 타이모크라시timocracy라고 부른 것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군인다움에 대한 숭상, 금전에 대한 집착 등이 플라톤이 생각했던 타이모크라틱한 인간형의 특징이었다.* 대규모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김없이 타이모크라틱한 문화와 인간형이 발달한다. 플라톤이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지만,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의 문화에서도 이 명칭에 부합하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남자다움에 대한 칭송, 여성의 이상화와 격리, 한마디로 얼마간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 노예제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명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과 노예의 차이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정투쟁의 장 외부를 구성하는 노예의 존재는 이 투쟁을 생사를 건 싸움life-and-death struggle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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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Cambridge /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p.386, note 14. (이하 각주 내용은 생략)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6)라는 책에서 옮겼다(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중에서, 61~62)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 명예와 자존심에 지나친 인간형을 지적하고 있다. 저 각주에는 어느 지역의 남성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미리' 그 시시비비가 싫어서(내가 지금 그런 시시비비를 해서 뭘 하겠나) 저렇게 마음대로 생략해 버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에서는 더욱 그랬다. 명예와 자존심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주변 사람들을 깔아뭉개려 드는 인간이 밉고 혐오스럽지만,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평생을 그런 인간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궁금하고 가련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쉽다. 그들은 그래서 가련하다.

그럼 궁금한 건 무엇인가? 나는 가련한 것보다 이것에 마음이 더 쓰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혹은 노예 같은 존재)인 줄 알까? 알기나 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더 가련할까, 자신이 노예 같은 존재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 가련할까?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 노예 같은 인간이 아닌가? 확실한가?" 묻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나는 그냥 타이모크라틱한 인간부터 싫다. 이게 내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