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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내 친구 김정욱 교수

by 답설재 2025. 12. 28.




김형석 교수는 어릴 때 하도 병약해서 어머니가 세상을 알게 될 스무 살까지만이라도 살면 좋겠다고 했다는데, 그는 올해 만 105세란다.

지금도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그는 건강은 의사에게 맡겨 신경을 쓰지 않고 정서적 건강에 힘쓴다고 했다.

"사람은 '이젠 내가 늙었구나' 생각할 때 늙습니다. 정신은 늙지 않아요."

인터넷에서 그가 한 말을 읽는 순간, 김정욱 교수가 떠올랐다.

내 친구 김정욱 교수는 지난해 11월 말 세상을 떠났다.
그를 생각하면 온몸에서 힘이 빠진다.
지지난해 만 90세가 되었는데, 이후 만날 때마다 "내가 90세가 되었어요!" "내 나이가 그새 90이 나 되었네요!"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요즘은 90은 아무것도 아닌걸요." "최소한 100살은 넘겨야지요." 하면서도 '왜 이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충격이 꽤나 큰가 보다.' 했다.

그러자마자 그는 세상을 떠나버렸고, 그러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심지어 나는 김 교수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가 떠난 지 1년 만인 지난 11월 말, 마음을 비우게 되었다.

세상은 그대로다.

사실은 그와 나를 연결하는 지인은 딱 한 명이었다. 그는 세상을 누비며 살아간 세계적인 과학자였고, 나는 이 동네 주민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가 떠난 것을 인정한 후 나는 내가 아흔이 되면 과연 그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까 싶지 않았고, 그동안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이 되었을 때 그 매듭 같은 나이의 느낌이 다른 해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아흔이 되는 해만 잘 넘기면 몇 해 더 사는 건 쉬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공연히 이 일을 이야기해 주었는지 몰라도 아내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구십이나 살려고?"
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아내는 죽음에 이른 노인들이 겪는 일들을 주섬주섬 이야기했다.
그 꼴을 어떻게 겪으려고 그러느냐는 이야기였다.
'이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겠다는 건가? 아니면, 팽개쳐 놓겠다는 건가?'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까 그런 건 아니었고, 병원에서 골골하며 고생하는 건 삶의 의미가 없고, 고생만 더 하고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 외로움 같은 게 엄습해 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당장 마무리를 해야 한다.
알겠다! 그런데 그게 생각한다고 되는 일인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생각대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김 교수는 한동안 매주 2회씩 투석을 했다.

와중에도 손꼽아 기다려 나와 만나곤 했다. 더 자주 만날 걸 그랬나? 그렇게 띄엄띄엄 만나는 것도 육체적으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아파트에 살다가 전원주택으로 옮길 때 전원주택 건축업자의 말만 믿고 아파트를 팔아넘겼다가 입주 일자가 늦어져 우리 집으로 주소를 옮겼을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역 앞 햄버거 가게 앞에서 상품권 봉투를 내밀었을 때 내가 정색하고 따지던 일도 떠올랐다. 그는 그때 당황해했었다. 한국은 으레 그런 건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봉투를 받을 걸 그랬나? 그럼 그의 마음이 더 편해져서 며칠쯤 더 살았을까?

만날 때마다 그가 즐겨 마시던 콜라를 말렸어야 했나? 그럼 한두 달쯤 더 살았을까?

미국에서 오는 연금만 해도 월 1,000만원이 넘는다며 만날 때 자기가 돈을 내면 안 되겠는지 물었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요청을 받아줄 걸 그랬나? 그럼 신이 났을까? 조금 더 살 수 있었을까?

그가 고등과학원에서 퇴근하고, 내가 사무실에서 퇴근해서 ITX와 버스를 함께 타고 오던 날들은 행복했었다.
매일 고등과학원 연구실에 나가다가 점점 뜸해지고 끝내 행사가 있을 때만 나가던 일, 걸핏하면 미국에서 부인과 함께하던 일들 이야기(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만든 사진첩을 주었다. 나는 그걸 귀중본으로 보관하고 있다), 두 명의 누이동생 이야기, 필리핀에서의 스쿠버다이빙 이야기(그때 찍었다는 수중생물 사진 USB는 어디로 갔지?), 반려견을 애틋해하던 일, 물리학에 관한 질문을 하면 반가워하고 열을 올려 설명하던 일......  

그가 가버리자 아무도 그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그가 살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다르다. 그는 이론물리학자니까 저 우주에서 살았고 나는 이 아파트 주민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는 내게 잠시 머물다가 돌아간 것이다.
그는 지금 저 하늘가 어디에서 그리워하던 부인과 만났을까?

나는 때로 미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