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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비굴하게 살기 (2)

by 답설재 2026. 3. 25.

부장교사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다.

 

① 여러 명이 지원했는데 교장이 선발해서 그 지명을 받는 길
② 희망하는 교사가 없어서 그 학년 또는 특정 업무를 자원해서 맡는 길
③ 동료교사들의 추천을 받는 길
④ 제비 뽑기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떠맡는 길
⑤ 1급 정교사가 부족하거나 기피해서 2급 정교사인데도 지명받는 길
⑥ 맡고 싶어 하는 교사가 없어서 기간제 교사인데도 지명받는 길

⑦ 따질 것도 없이 그 분교장에 혼자 근무하며 모든 일을 다 맡아 처리하는 길

⑧ (그 밖의 길)

④ ⑤ ⑥ ⑦의 경우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목격한 적은 없다.
더구나 나는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을 고려해서 어떤 교사에게 어떤 부장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 교사가 당장 수용하지 않으면 겸양의 모습을 보이는 줄 알았지, 싫다고 한 것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울 적'이어서 그랬는지 퇴임 직전까지 교사가 나를 찾아와 자신이 어떤 업무의 부장을 맡게 해달라고 조르는 경우는 봤다.

 

그날 아침, 아직 수업 시작 전이었고,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그 교사가 들어왔고, 내 앞에 서더니 막무가내로 "교장선생님, 저 ○○부장을 맡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왜 그 부장을 맡고 싶은지, 맡으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교감도 있는데 왜 나에게 직접 요청하는지 등 물어볼 만한 걸 생각해야 하고, 차근차근 그 대답을 들어보는 게 순리일 텐데, 이런 일이 있나! 그 교사는 내가 단 한 마디도 하기 전에 그 자리에서 덥석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간청하는 모습을 연출해 버렸다.

 

 

AI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저 색깔의 옷은 내가 가장 즐겨입던 것이었다. 또 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블로그에 쓰면 좋겠다"고 했다. 내 블로그를 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순간, 나는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나는 교장실 출입을 통제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 상황에서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무릎을 꿇은 이 교사는 어떤 말을 듣게 될지 그것도 간과하거나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내 입장이 뭐가 되겠나?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비치게 될까?

그 상황은 내게는 정말이지 까무러칠 일이었다. 내가 이런 일을 가지고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건 꿈에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누굴 죽이려고 작정했습니까? 나를 알량한 교장 업무를 가지고 교직원들에 권력을 휘두르는 같잖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작정입니까?" 어떻고 하면 어쨌든 한참 걸릴 일이고 그동안 통제도 하지 않는 교장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만 생각했다.

 

나는 그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 선생님! 이러지 마십시오. 제발, 제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피차 이게 무슨 꼴입니까!...... 진정 좀 하십시오!......"

그렇게 한참 동안 그 교사를 달랬을 것이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종일 멍한 상태였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살다가 이런 일도 당하는구나......' '인간사회라는 게 이렇기도 하구나......'

 

 

 

"쳇봇, 고마워~ '내가 그날 이랬었구나...'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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