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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정명환 단상 《인상과 편견》

by 답설재 2025. 3. 21.

 

 

 

정명환 단상 《인상과 편견》

현대문학 2013

 

 

 

한 작가의 사상이 어떻다고 미리 결정하고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참으로 마땅치 않은 일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작품이 줄 수 있는 풍요한 의미를 등한시하고 또 작가의 변신을 모르고 지나간다는 큰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특히 앙드레 지드처럼 변신을 거듭하는 작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1952)

 

누구나 다 알다시피 예술작품에 관해서는 "그것은 객관적으로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합당하지 않다. 그것이 철학의 포부(늘 좌절되는 포부이지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철학적 주장은 "그것은 개관적으로 진실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의해서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철학자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이 타격의 연속이 철학사를 형성해왔다. 한데 그 연속이 진실로 영구불변한 개관적 진리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생성의 과정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에 반하여 객관적 진리를 내세우지 않는 예술은 바로 그 무능 때문에 호소력을 가진다. "나는 이렇게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나와 같이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란다"라는 겸허성에 예술작품을 발표하는 이유가 있고 또 그 생명이 있다. 왜냐하면 이 겸허한 인식과 생각과 느낌은 무수하고 다양하며, 우리는 우리의 지적, 도덕적, 미적 삶을 위해서 상황에 따라 그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또 그 선택을 시시각각 바꾸어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령 셰익스피어로부터 베게트로, 보들레르로, 노신으로, 이청준으로 두서없이 옮겨 다니면서 인생의 가지가지 표현에 접하고, 그 덕분에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지성의 힘을 기르고, 또한 취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이다. (2009)

 

 

 

이 작가 얘기한 거지, 맞지!

공감하면 그만 아니니?
다른 뭐가 있다면, 그럼 어떻게 하겠니? 한판 붙어볼 수도 있다고 하겠니?
그렇게 하며 그냥 그대로 살아가겠다는 거니? 쓸데없는 비판이나 일삼으면서? 한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