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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올리버 색스가 이야기한 지적장애인의 '구체성'

by 답설재 2025. 3. 23.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속 삽화(296)

 

 

 

어젯밤 늦게 인터넷 서핑을 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다. 정년퇴임한 D대 K 교수의 회고담이었다. 나는 중앙부처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인데 내가 그의 일을 살뜰히 살펴주었다고 써놓았다.

 

나는 야간대학 편입으로 2년을 더 배워 사범대학 졸업장을 받았고, 그때 특수교육 28학점을 이수해서 특수교사 자격증도 받았지만 실제로 그 자격증을 쓰진 않았다. 교육학을 더 배운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그러다가 교육부에서 일할 때 그렇게 배운 것을 톡톡히 '써먹었다'. 내가 본래 맡고 있던 일 외에 추가로 특수학교 교육과정 및 교과서 개발까지 맡은 것이었다. 말이 특수학교지 그건 유치부,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에다가 시각장애, 청각장애, 정신지체, 지체부자유, 정서장애 등 여러 영역이 있어서 제대로 일하려면 한이 없는 업무였는데, 나는 그걸 일반학교 교육과정·교과서 개발 관리와 똑같은 비중으로 처리하고 싶어 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특수교육에 대해 배운 것을 "톡톡히 써먹었다"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완전히 뒤집어쓴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지긋지긋하다.

다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봤자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들 중 어느 누가 나에게 일말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나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D대 K 교수가 단 한 마디이긴 하지만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이었다.

 

그렇다고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다고나에게 장애를 가진 학생에 대한 관심도 없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가령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면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뭐랄까,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걸 느낀다. 그러면서 마음의 짐 같은 것도 느낀다. 저 아이를 저렇게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지금 누가 어떻게 보살피고 지도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어 한다. 저 아이도 잘 배워서 나중에 뭔가 자립하는 길을 가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나는 쓰기 시작하면 매번 이렇다. 어쩔 수 없다. 이 글도 '지적장애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읽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으니까 관심도 없는 사람도 읽어보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그야말로 1도 없다.

 

얼마 전에 참 좋은 올리버 색스(신경의학자, 의사, 작가)가 쓴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다가 지적장애인의 특성에 관한 부분을 옮겨 썼다. 이렇게 해놓고 뭔가 나름대로 '절절한 해설'을 덧붙여 보자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건 우스운 일이 되겠다 싶어서 그냥 두기로 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제롬 브루너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어서 올리버 색스의 글이 더욱 빛나는 느낌이었다.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지적장애인이 가진 마음의 '질'을 인정해야 한다(어린아이나 '미개인'의 마음을 접했을 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클리퍼드 기어츠가 되풀이해서 강조했듯이 지적장애인, 어린아이, 미개인 등 세 부류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미개인은 지능이 낮은 사람이나 어린아이가 아니며 어린아이의 문화는 미개인의 문화가 아니다. 또한 지능이 낮다고 해서 미개인이나 어린아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중요한 유사점도 있다. 피아제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연구해서 밝혀낸 것과 레비스트로스가 미개인의 마음을 연구해서 밝혀낸 것은,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지적장애인들의 마음과 정신세계에도 그대로 인정된다.

이 연구를 계속한다면 마음과 지성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루리아가 말한 '신비로운 과학'에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과연 지적장애인들에게 특징적인 마음의 질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천진난만함과 투명함, 완전함, 존엄은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어린아이의 세계나 미개인의 세계와 같이 '조금 모자란 이들의 세계'라는 것을 설정한다면 그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구체성'이다. 그들의 세계는 생기 있고 정감이 넘치고 상세하면서도 단순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통해 복잡해진 것도, 희박해진 것도, 통일된 것도 없다. (...) (290~291)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매혹과 패러독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구체성'은 꽤나 까다로운 개념이다. 이것은 상당히 애매한 개념이어서 해석하기가 어렵다. 의사나 치료사, 교사, 과학자에게 특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에 대한 연구이다. '구체성'에 대한 연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져야만 한다.(293)

 

좀 더 흥미롭고 인간미가 깃든 맛 그리고 좀 더 감동적이고 현실적인 맛은 그들이 그들의 특질인 구체성을 어떻게 적절하게 활용하고 발전시키는지를 살펴보면 느낄 수 있다. 지적장애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부모나 교사는 그들이 구체성을 어떻게 활용하고 발전시키는지를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이 점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신비로움, 아름다움, 심오함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또한 그 구체적인 것을 통해서 감정, 상상력, 혼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떠한 추상적 개념에 못지않게 효과적이다(아마 추상 개념 이상으로 효과적일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게르숌 숄렘은 1965년에 관념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대비시켜 논했고, 제롬 브루너는 1984년에 '패러다임적인 것'과 '이야기적인 것'을 대비시켜 논했다). 구체적인 것에는 감정과 의미를 손쉽게 흘려 넣을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추상개념보다 쉬울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손쉽게 아름다운 것, 극적인 것, 희극적인 것, 상징적인 것이 되며, 예술이나 정신과 같은 심오한 것으로 승화될 수 있다. 개념적으로 말할 때, 지적장애는 불구일지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이해하는 힘은 건강한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이것은 과학이며 동시에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다). (294~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