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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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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

by 답설재 2024. 11. 24.

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

Wolfgang Borchert 《Die Ausgelieferten》

박병덕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1월호

 

 

 

 

 

 

저 밖에 도시가 서 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서서 감시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거리에는 보리수, 쓰레기통 그리고 아가씨들이 서 있다. 그것들의 냄새가 곧 밤의 냄새이다. 그것은 독하고 씁쓸하고 달콤하다. 가느다란 연기가 반짝거리는 지붕들 위에 수직으로 가파르게 떠 있다. 북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비가 그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니 지붕들은 아직도 빗물로 반짝이고, 빗물에 젖은 거무스름한 기와 위로 별들이 하얗게 떠 있다. 이따금씩 발정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달까지 치솟아 오른다. 어쩌면 인간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교외의 공원과 정원에는 빈혈에 걸린 듯 창백한 안개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거리마다 맴돌며 피어오른다. 기관차 한 대가 먼 곳에 대한 그리움으로 흐느껴 울면서 잠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의 꿈속 깊이 기적 소리를 울려 보낸다. 거기엔 창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밤이면 이 창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가 도망치고 난 뒤부터 줄곧 지붕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저 밖에 도시가 서 있다. 집 한 채가 그 도시에 서 있다. (......)

 

"너 그거 모르겠니? 넌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져 있다는 걸 모르겠어? 저 먼 것,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불확실한 것, 어두운 것에 내맡겨져 있다는 걸? 넌 우리가 웃음거리에, 슬픔과 눈물에, 울부짖음에 내맡겨져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니? 이봐, 그 웃음, 우리 자신에 대한 웃음 말이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 부풀어 오른다면, 끔찍한 일이야.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들과 친구들과 아내들이 묻힌 무덤가에 서 있으면 그 웃음이 벌떡 일어서지. 고통을 엿보는 이 세상의 웃음. 우리가 울 때면 우리 마음속에서 슬픔을 자아내는 웃음. 우리는 그 웃음에 내맡겨져 있어. (.....)"

 

"(......) 우리는 마치 영원이 우리에게 확실히 주어진 것처럼 미소 짓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이별이, 모든 이별이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모든 죽음을 우리 안에 담고 다녀. 척수에, 폐에, 심장에, 간에, 피에, 우리 몸 도처에 죽음을 담고 돌아다니면서도 우리는 애무의 소나기 속에서 우리 자신과 죽음을 잊어버리지. 아니면 손이 그렇게 가늘고 길어서 그리고 살갗이 그렇게 해맑아서 그럴 수도 있어. 그런데 죽음, 죽음, 그 죽음이라는 놈이 우리의 신음 소리와 자꾸 더듬는 말을 비웃고 있어!"

 

 

《내 맡겨진 사람들》 중 「지붕 위의 대화 : 베른하르트 마이어-마르비츠를 위해」의 부분.

 

 

이런 작가가 있었네.

 

 

1921년 독일 함부르크 에펜도르프 출생. 열다섯 살에 시를 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함부르크 유력 일간지에 시를 발표. 졸업 후 서점 직원으로 일하다 연극배우의 꿈을 키움. 불온한 시를 쓴 혐의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신문을 받기도 함.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칼리닌의 겨울 전투에 참전. 1945년 프랑스 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이동 중에 탈주해 함부르크로 귀환. 함부르크 극장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하던 중 병이 악화되어 쓰러진 후, 세상을 뜨기까지 2년 동안 병상에서 여러 시와 산문, 희곡을 집필. 1947년 완성한 희곡 「문밖에서」는 방송극으로 만들어져 큰 호응을 얻음. 1947년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사후 산문은 『민들레』라는 산문집으로, 시는 『가로등, 밤 그리고 별들』로 엮여 출간됨. 그의 글은 스스로 체험한 현실을 생생하게 담고 있으며, 전쟁과 물질문명, 기성세대에 대한 절망과 거부감을 응축되고 간명한 언어로 묘사함. 이후 '47그룹'으로 불리는 작가들에 영향을 줌.

 

 

스물여섯 살에 타계?

평균수명만큼만 살았더라면 아주 끝장을 낼 작가였는데......

 

 

이따금 그는 자기 자신과 맞닥뜨렸다. 그는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비뚤어진 어깨를 하고 자기 자신에게 다가갔는데, 그의 머리카락은 귀를 완전히 덮을 정도로 너무 길었다. 그는 힘주어 손을 꽉 잡지는 않은 채 자기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안녕.

안녕. 넌 누구니?

너지.

나라고?

그래.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넌 왜 가끔 소리를 지르지?

그건 그 짐승이 그러는 거야.

짐승?

굶주림이라는 짐승.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넌 왜 자주 우니?

그 짐승이야! 그 짐승!

짐승?

향수鄕愁라는 짐승. 그놈이 우는 거야. 굶주림이라는 짐승. 그놈이 소리를 지르지. 그리고 나라는 짐승. 그놈이 도망치지.

어디로?

허무 속으로! 도망칠 골짜기가 없어. 도처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만나. 대부분은 밤에. 그러나 우린 점점 더 멀리 도망쳐. 사랑이라는 짐승이 우리를 붙잡지만, 공포라는 짐승이 창문 앞에서 으르렁 짖어대고, 창문 뒤엔 아가씨와 그녀의 침대가 서 있지. 문의 손잡이가 웃음을 참다못해 킥킥거리면, 우린 도망치지.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꽁무니를 쫓고 있어. 뱃속에는 굶주림이라는 짐승이 있고 가슴속에는 향수라는 짐승이 있지. 그러나 도망칠 골짜기가 없어.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나지. 도처에서. 우린 우리 자신을 피할 수가 없어.

(......)

 

「도중에」 중 '지난 일이다, 다 지난 일이다'의 첫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