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산문 《허송세월》
나남 2024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늙기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되는 '산문'이다. 액정화면 속의 정보로 배달된 죽음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입장에서는 재미있진 않고 불편하긴 하지만 죽음 이후가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만은 절실하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바라는 것이 실현된다 해도 얼마나 구차한 일이겠는가.
노년과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때로는 책을 놓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대목에서였다.
새들은 어디서 죽는가. 나는 해마다 한강 하구 일대를 자전거로 다니면서 모래톱에 앉은 새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나는 새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 새들은 한강 하구에서 죽지 않는다. 새들은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는가. 한강 하구에서 죽지 않는 새들이 기어코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을 까닭도 없어 보였다. 죽을 자리를 애써서 고르지 않는 듯싶다. 떠나온 자리와 떠나갈 자리가 같다. 여기는 새들의 고향이 아니고 거기도 새들의 고향이 아니다.
아마도 새들은 대륙을 오고 가는 비행 중에 바람 속에서 죽고, 가루가 되어서 종족의 운명 속으로 산화하는 것이리라. 새들은 이승의 땅에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머물지 않고 옮겨 사는 저들의 가혹한 운명은 가벼워 보인다.
나는 요즘 철새의 주검 찾기를 단념했다.(212~213)
'허송세월'은 호수의 윤슬을 바라보는 시간의 유유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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