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일이 주된 일과가 되었지만, 나 자신에 관해서는 '책을 쓰면 뭘 해' 생각합니다. 전에, 젊은 시절에 아이들 보라고 낸 책 중에는 히트를 친 것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책은 원고를 '매절'로 넘겼거나 공저자가 여럿이어서 몇 푼 받지도 못한 경우였습니다. 책 써서 재미를 못 봤다는 얘기입니다.
교사로서 살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괜히 부추겨서 이름 없는 화가를 만든 경우 등은 가슴 아픈 일이었고, 홉스 봄의 지적대로 잘하는 아이는 그냥 두어도 잘한다 싶어서 자주 잘 못하는 아이에게 다가간 건 내가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새로 한다면 당연히 더 잘해보려고 하겠지만 굳이 새로 하고 싶지는 않고, 한 번 더 살아보는 것 자체가 꿈도 꾸기 싫은 일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 떠나는 일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책을 쓰는 이에게, 혹은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런 글을 보면 "이것 좀 보세요!" 하게 됩니다.
다음은 "다정한 물리학"(해리 클리프)에서 옮겼습니다.
프레드 호일은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킨 천문학자였다.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에서 가난한 양모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 툭하면 학교를 빼먹으며 허솔세월을 하다가, 어느 날 동네 도서관에서 과학책 한 권을 빌려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책은 아서 에딩턴이 집필한 『별과 원자 Stars and Atoms』였는데, 이 두 가지 주제는 향후 호일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그는 고교 시절 한 선생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며, 몇 년 후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우연히도 "우리가 아는 한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양자물리학자"인 폴 디랙Paul Dirac의 제자가 되었다.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지도교수로서는 별 열정이 없었던 디랙은 1930년대 중반에 호일을 불러 앉혀놓고 그의 일생을 바꿀 조언을 해주었다. "물리학의 전성기는 끝났다네. 양자혁명은 일단락되었고,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려면 한참 기다려야겠지. 과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게 자네의 목적이라면, 전공을 다른 분야로 바꾸는 게 좋을 걸세." 그때부터 프레드 호일이 관심을 둔 것은 '별'이었다.
그 후 호일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상습적인 반대론자" 또는 "다른 과학자를 깔아뭉개는 독설가"로 유명세를 떨렸다. 그는 BBC 텔레비전의 인기 시리즈 《안드로메다은하의 A : A for Andromeda》의 대본을 쓸 정도로 SF 소설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역시 최고의 특기는 다른 사람이 이론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빅뱅은 틀린 이론이 아니라 아예 사이비 이론이다. 빅뱅이 일어난 원인 자체를 모르는데,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백날 논의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호일은 빅뱅이론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호일의 입이 다소 거칠고 공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분명히 뛰어난 과학자였다. 사실 그가 자신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 반골 기질 덕분이었다. (...) (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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