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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정인지 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by 답설재 2024. 7. 6.

정인지 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이윤식 옮김, 솔 1997

 

 

 

 

 

 

한학(漢學) 공부 좀 할 걸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정치인들이 사자성어나 고사, 옛 문헌의 한 구절 혹은 어떤 단어를 들어 남을 헐뜯을 때다. 그런 걸 인용해서 덕담을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려웠다. 그렇거나 말거나 '저 사람은 그렇게 분주한 생활을 하는데도 한학을 깊이 한 것 같은데 난 뭘 했지?' 한탄을 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시경(詩經)을 한번 읽어봤는데 나로서는 아는 척할 때 써먹을 만한 부분을 눈 닦고 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제 책을 읽을 만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는 척할 때 써먹으려고 책을 들여다보는 무모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노릇도 소질이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러기에 정치인은 예사로운 두뇌를 가진 분들이 아닌가 보다' '혹 정치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바쁘진 않은 건가? 그들 중 몇몇은 주로 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주로 그런 좋은 말을 촌철살인 격(寸鐵殺人格)으로 쓰는 걸까?

 

요전에는 뉴스 시간에 어느 정치인이 '용비어천가'를 패러디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았다. 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우리에게 국어 교과서에 나온 용비어천가를 읽어주시던 이용기 선생님을 떠올렸다. 좀 오래되어 교과서의 고문( 古文)은 기억나지 않고 선생님의 고운 음성만 들린다.

 

해동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

불휘 깊은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곳 됴쿄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송구스러운 짐작이지만 선생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셨겠지? 살아계신다 해도 100세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선생님 얼굴은 60년 전 그때와 하나도 다름없이 떠오르는데, 언젠가 멀리 전근 가신 학교로 찾아뵌 이후로는 그만이었다. 선생님은 내 생각을, 내가 선생님을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나는 내가 살아가는 데만 정신이 빠져 결국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비어천가 서

 

신이 가만히 보건대 천지의 도는 넓고 두터우며 높고도 밝으므로, 그 도가 덮고 싣는 것은 오래되었고 또 영원합니다. 왕실 조상의 덕은 두껍게 쌓여 있고 또 깊고도 멀므로 그 왕업의 터는 오래되었고 또 무궁합니다.

사람들은 바다와 산천의 널려 있음과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의 자연히 자라남 그리고 바람과 비, 천둥과 벼락의 변화와 천체가 운행하고 계절이 바뀌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지, 천지의 도가 쉬지 않는 그 넓고 두터우며 높고도 밝은 공은 모릅니다. 또 사람들은 종묘宗廟와 궁실의 아름다움, 백성들의 부유하고 풍성함 그리고 예악禮樂과 정치와 형벌의 밝게 이루어짐과 어진 은혜와 교화가 넘치는 것만을 보았지 오랫동안 쌓인 길고도 먼 뽑히지 않는 기초가 있음을 모릅니다.

(...)

 

 

용비어천가를 올리는 전箋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집현전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관사성 신 권제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兼成均館司成臣權踶와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집현전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정인지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集賢殿大提學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鄭麟趾 그리고 가선대부 공조참판 집현전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신 안지嘉善大夫工曹參判集賢殿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臣安止 등은 아뢰옵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덕과 인仁이 널리 세상에 미쳐 왕성하게 일어나고 널리 퍼지니, 이러한 공을 엮고 사실을 기록하여 마땅히 노래로 퍼뜨리려고 하나 책을 편찬하면 쓸데없는 말이 되어 임금의 밝음을 손상시킬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근원이 먼 물은 더욱 길게 흐릅니다. 주周나라에서 면과綿瓜를 읊은 것은 그 나온 바의 근원을 캐내는 것이고, 상商나라에서 현조玄鳥를 노래한 것은 그 태어난 바를 서술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새 왕조가 일어나는 데는 필히 그 앞선 세대에서 이루어놓은 것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제1권

 

제1장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날으시어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제2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이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제3장

 

주국태왕周國太王이 빈곡豳谷에 사셔서 제업帝業을 여시니

우리 시조가 경흥慶興에 사셔서 왕업王業을 여시니

 

제4장

 

적인狄人 사이에 가시니 적인이 침범하거늘 기산岐山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니

야인野人 사이에 가시니 야인이 침범하거늘 덕원德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니

 

제5장

 

칠저漆沮 가에 움집을 후성後聖이 이르시니 제업우근帝業憂勤이 저러하시니

적도赤島 안에 움집을 지금至今에 보니, 왕업간난王業艱難이 이러하시니

 

제6장

 

상덕商德이 쇠衰하거든 천하天下를 맡으시려할쌔 서수西水 강가가 저자 같으니

여운麗運이 쇠衰하므로 나라를 맡으시려할쌔 동해東海의 가가 저자 같으니

 

(...)

 

~ 제10권 제12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