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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가설 학습'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설명

by 답설재 2023. 12. 22.

 

 

 

 

지금 가정부의 아들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에게 질문한다.

 

 

안드레아  가설이 뭐예요?

갈릴레이  그럴 것 같다고 추정하지만, 사실을 확보하지 못한 주장이란다. 저 아래 광주리 가게 앞에서 펠리체 부인이 아기의 젖을 먹는 것이 아니고,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설이란다. 직접 가서 보고 확인하지 않는 한 별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보는 흐릿한 눈을 가진 벌레들과 같단다.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믿어 왔던 이론들은 무너질 지경에 이르겠지. 그런 이론들은 거창한데, 그걸 받치는 근거라는 기둥이 형편없이 약하거든. 법칙들은 많은데 그걸 설명해 주는 것은 거의 없단다. 이에 반해 새로운 가설들은 법칙은 별로 없지만 많은 사실을 밝혀주고 있지.

안드레아  하지만 선생님은 나한테 모든 걸 증명해 보이셨잖아요?

갈릴레이  다만,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지. 내 가설이 아주 멋있다는 것을 너도 알지? 게다가 어긋나는 점도 없고 말이야.

안드레아  갈릴레이 선생님, 나도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요!

갈릴레이  그래야지. 우리 분야에는 풀어야 할 엄청난 문제들 말이야. (창가로 가서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는 꽤 흥미를 느낀 목소리로) 안드레아, 이걸 통해 한번 봐라!

안드레아  세상에! 모든 게 가까이 보여요! 종탑 종들이 코앞에 있네요! 새겨진 글자까지 읽을 수 있어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옮겼다(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217~218).

이런 글을 보면 '교육이 이렇게 이루어져야 하는 건데...' 싶어서 아득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한때 극히 일부 교과목에서 '가설'을 중시한 적이 없진 않다. 과학에서는 더 그랬지만 사회과에서 탐구수업을 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때였다(한국교육개발원 사회과연구실 한면희 《탐구수업》).

 

지금은?

지금은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현재의 교재(교과서)를 가지고 가설을 중심으로 한 수업을 하려면 완전히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지식을 주입하는 수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교육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지식에 대해서는 학생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게 당면과제가 되어야 한다.

 

 

저 희곡《갈릴레이의 생애》에서는 가설과 연관 짓고 싶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견해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다음 문장도 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학문을 추구하는 일은 특별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네. 학문은 의심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거래하는 일이네. 학문은 만인들을 위해 만물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서 만인들을 의심하는 자로 만들려 하는 것이네.(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