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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지식의 쓰레기

by 답설재 2023. 12. 13.

20190506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가 된다.

가령 인터넷에서 보는 '지식'에서 그 쓰레기를 구분하지 못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는 허다하다.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이 지금도 우리 생활에 유용한 지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이 나오면 그 새 지식이 나온 부분의 묵은 지식은 당연히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다.

 

교육부에서는 학생들에게 전해줄 마땅한 지식을 선정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새로운 지식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지 말아야 할 쓰레기 같은 지식은 어떤 것인지, 잘 구분해서 선정하려고 한다.

그걸 정해놓은 것이 '교육과정'이고, 그 지식을 실제적으로 담아놓은 것이 '교과서'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 사당동 전셋집 2층에서 혼자 살 때, 초등학교 사회과에서 가르쳐야 할 지식을 선정하는 일을 잘해보려고 벽에 모조 전지를 붙여 놓고 거기에 손으로 일일이 기록한 '사회과 내용 체계표'를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수정하곤 했다.

그렇게 자꾸 수정하면서 그 표가 너무 복잡해지고 알아보기가 어려워지면 그걸 또 새로 만들어 붙여놓고 또 그렇게 했다.

당연히 해당 교과목별로 교육과정 연구팀을 운영하는 것이지만 최종 책임은 내게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

그건 6차 교육과정 때의 일이었고 파견교사 시절이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현 '미래엔')에서 그 교육과정을 책자로 만들 때, 인쇄 과정에서도 나는 전화를 해서 어떤 문장을 어떻게 고치라고 통보하기도 했는데 다른 편수관이 그런 연락을 하면 긴가민가했겠지만 나는 워낙 '독한 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서 당장 알겠다고 했었다.

내가 '독종'이라는 건 한국교육개발원이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도 소문이 다 나 있었다.

 

7차 교육과정 때도 당연히 그 작업을 했다.

연구팀은 교수들이 대부분이었고 초등학교 사회과는 인천교육대학교 한면희 교수가 위원장이었는데 그는 너무나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양재동 교육문화회관(현 K호텔)이나 과천 호프호텔에서 자주 그 작업을 했는데 한 교수는 잠을 잘 생각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교육부 일에 진이 빠졌는지 새벽 두세 시가 되면 "이제 잠 좀 자자"고 졸랐고, 그러면 그분은 "편수관이 장관 대신 참여하는 것인데 제발 훼방을 놓지나 말고 혼자서 자라"고 했다.

 

이후 나는 곧 초중고등학교 전체를 총괄하는 담당관이 되었고, 7차 교육과정이 고등학교 3학년에 적용되는 그해 9월 초에 용인에 있는 학교 교장으로 나왔다.

그때 한면희 교수는 내가 앉아 있는 교장실을 찾아오곤 했는데 이미 암이 깊어 약으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왜 그렇게 악착 같이 일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병이 들어서야 지식을 검토하고 선정하는 일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회의감에 싸여 있었고, 나는 주제넘지만 교육부장관 대신, 혹은 전국의 학생들, 학부모들 대신 그분을 위로하면서 남은 시간을 가슴 아프게 보내지 않도록 하려고 궁리했지만 속으로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이미 2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금도 책을 읽다가 '이건 좋은 지식이구나!' 싶으면 일일이 옮겨 써보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한스 로슬링《팩트풀니스》355~358)..

 

 


(...) 왜 우리는 학교에서, 사내 교육에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최신 기초 정보를 가르치지 않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실에 근거한 사고의 기본 틀(네 단계와 네 지역에서의 삶)을 가르치고,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면 주변 세계와 관련한 뉴스를 들어도 전후 맥락을 고려하고 언론, 활동가, 영업 사원이 과도하게 극적인 이야기로 극적 본능을 자극할 때도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기술은 많은 학교에서 이미 가르치는 비판적 사고의 일부이며, 다음 세대를 여러 가지 무지에서 보호할 것이다.


· 나라마다 건강과 소득수준이 다르고, 대부분의 나라가 중간 수준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 내 나라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 내 나라가 지금까지 발전해온 과정을 소득수준 변화와 함께 이해하고, 그 지식을 이용해 오늘날 다른 나라의 삶도 이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올라가고 거의 모든 것이 개선되고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 과거에는 삶이 어떠했는지 가르쳐, 발전이 없었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세상에는 나쁜 일도 일어나지만 점점 개선되는 것도 많다는 생각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 문화적·종교적 고정관념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 뉴스를 소비하는 법, 스트레스를 받거나 절망하지 않고 극적인 이야기를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사람들이 흔히 수치로 어떻게 속임수를 쓰는지 가르쳐야 한다.
· 세계는 계속 변화해서 살아가는 내내 지식과 세계관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겸손과 호기심을 가르쳐야 한다. 여기서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른다"고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겸손하면 모든 것에 대해 내 견해가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고, 항상 내 견해를 옹호할 준비를 해야 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 편하다.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아울러 내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실수에서 호기심을 이끌어내자. '내가 그 사실을 어쩌면 이렇게 잘못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들이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왜 그런 해결책을 썼을까? 호기심을 품으면 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 꽤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세계는 계속 변할 것이고, 무지한 어른의 문제는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에 관한 지식은 졸업하고 10~20년이 지나면 낡은 지식이 된다. 그래서 어른의 지식도 계속 업데이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동차 업계는 차에 결함이 생기면 리콜을 단행한다. 구매자는 제조업체에서 "귀하의 차량을 회수해 브레이크를 교체해드리려 합니다"라는 편지를 받는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에 관한 사실이 낡았을 때도 "죄송하지만 저희가 가르쳐드린 지식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귀하의 뇌를 보내주시면 무상으로 업그레이드해드리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받아야 한다. 또는 고용주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계경제포럼이나 그와 비슷한 회의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이 자료를 잘 읽고 이 문제를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챙 넓은 멕시코 모자를 달러 스트리트로 교체하라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다른 나라와 다른 종교를 배우기 시작한다. 세계지도에 각 나라의 민속 의상을 입은 사람을 예쁘게 그려 넣어 그들을 알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비록 의도는 좋지만 각 문화에 큰 차이가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을 과거 역사와 이국적 삶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멕시코 사람 중엔 챙 넓은 멕시코 모자를 쓰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요즘 그런 모자를 쓰는 사람은 주로 관광객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그런 모자보다는 달러 스트리트를,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자.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 dollarstreet.org를 '여행'하며, 한 나라 안에서의 차이점과 여러 나라 사이의 비슷한 점을 찾아보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