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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돈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by 답설재 2023. 9. 2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자히르」에는 돈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소설집《알레프》).

 

 

잠을 이루지 못해 뭔가에 홀린 듯이 거의 행복한 마음으로 나는 돈보다 더 물질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어떤 동전이든지(가령 20 센터보짜리 동전) 가능한 미래의 창고이기 때문이다. 나는 "돈은 추상적이다. 돈은 미래의 시간이다."라고 되풀이했다. 그것은 외곽 지역에서의 어느 오후일 수도 있고, 브람스의 음악일 수도 있으며, 지도일 수도 있고, 체스일 수도 있으며, 커피일 수도 있고, 황금을 경멸하도록  가르치는 에피테투스(Epictetus 55?~135?,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의 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파로스 섬의 프로테우스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프로테우스이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즉 이슬람이나 스토아학파의 경직된 시간이 아니라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의 시간이다. 결정론자들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가능한 사건, 그러니까 '일어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사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하나의 동전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상징한다.

 

 

'미래의 창고'. 그렇지. 시간이 되어주고 여행과 휴식, 음악, 책, 바둑, 커피와 바꿀 수도 있고, 행복은 돈과 무관한 것이라고 한 철학이 정말 그런지 의구심을 갖게 하고, 나 자신을 완전 다른 사람으로 바꿔버릴 수도 있고, 시시각각 창조의 시간으로 쓸 수도 있고, 자유롭게 하고...

바로 앞에 이런 얘기도 보였다.

 

 

주인은 거스름돈으로 내게 자히르를 주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쳐다보았고, 거리로 나갔다. 아마도 고열이 시작되었던 것 같았다. 나는 역사나 전설을 통틀어 끝없이 반짝이는 동전들을 상징하지 않는 동전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카론의 은화를 생각했다.

 

 

'카론의 은화'? 주(註)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Char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매장 의식을 거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 스틱스 강과 아케론 강 사이를 건너게 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 대가로 시체의 입에 들어 있는 동전을 받았다.

 

 

그렇다면 죽을 때도 돈이 조금은 필요하겠지?

문득 염(殮)의 마지막 단계에서 죽은 이의 입에 동전을 물려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의식은 숨소리들 속에서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씻지도 않은 동전을?' 난데없이 장난스럽게 느껴져서 자칫하면 미소를 지을 뻔했었다.

좀 나은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 지폐를 물려주지 않고...'

어쨌거나 세상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도 그렇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장난이 아닌 건 분명하다.

 

다른 장면도 있다.

면소재지 앞을 흐르는 강 상류, 그 냇가에 들어온 가설극장에 가는 길이었다. '아리랑' 아니면 '안중근' 무성영화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 본 영화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저녁 식사 후 동전 몇 개씩을 주머니에 넣고 형들을 따라 어둠을 뚫고 산비탈길, 고갯마루, 논둑길, 밭둑길을 달렸다.

1.5km 쯤 갔을 때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다. 동전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입에 물었는데 숨이 차서 그랬겠지? 그걸 삼켜버렸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형들은 즉시 의논을 했고, 누군가 빌려줄 돈이 있다는 말을 했다.

다시 달리게 된 건 행복이었다. 동전을 여유 있게 가지고 있는 그 형이 바위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는 그렇게 유용한 돈을 좀 모아놓지 못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만 딱한 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이후로는 돈을 멋지게 쓰는 사람을 직접 만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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