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본심》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23년 2월호
"어머님의 VF(virtual figure)를 제작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VF에 관해서는 대략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일반적인 상식 정도밖에는......"
"가상공간 안에 인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모델이 있는 경우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인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시카와 시쿠야 씨의 경우에는 모델이 있는 쪽을 의뢰해 주셨네요. 겉모습은 실제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될 정도예요. 이를테면 저의 VF와 저 자신이 가상공간에서 이시카와 씨를 만나더라도 어느 쪽이 실물인지 분명 구별을 못 하실 거예요."
"그렇게까지 똑같아요?"
"이따가 보여드리겠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믿어주셔도 좋습니다. 말을 건네면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도 해주니까요. 다만 마음은 없습니다. 대화를 통사론統辭論을 바탕으로 분석해서 가장 적합한 답변을 하는 것뿐이지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찬물을 끼얹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고객님들은 중간에 반드시 VF에게서 마음을 느끼려고 하거든요. 물론 그게 VF의 이상적인 모습이지만, 그런 오해에 따른 클레임이 적잖이 들어오기 때문에 미리 내용을 고지해드리고 있습니다."
아직 반신반의였지만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니 기쁨보다 뭔가 위험한 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투는 제품 설명이라기보다 나에 대한 치로 방침의 확인 같았다.
"어머님은 생전에 VF 제작에 동의하셨습니까?"
"네......"
나는 거짓말을 했다. (...) (105~106)
나는 어머니가 품었던 인생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아버렸다. 어머니의 '자유사'를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상하이에 출장 중일 때, 어머니는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구급차로 실려 간 응급실에서 낯선 젊은 의사들이 둘러싸고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가까스로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원망했을까. 나와 함께일 때의 자신이 아니라 생판 타인의 눈앞에 자신을 드러낸 채 죽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몹시 한스러워했을까. 그래서 내가 그토록 누누이 얘기했었는데, 라고 아들을 나무랐을까. 어머니가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감정은 그런 후회였을까...... (131)
죽음, 죽는 순간이야 그렇다 치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런 세상은 생각만 해도 싫다.
싫은데도 그런 세상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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