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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의 가방》

by 답설재 2023. 4. 6.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의 가방》

현대문학 2012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

 

 

 

아이가 숟가락질을 다 배우고 나면 학교로 보내진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도 숟가락질의 다른 방법들이다. 연필을 쥐고 남들과 같은 모양으로 글씨를 쓰는 방법과 손가락을 꼽아 셈을 하는 방법, 거기에 따르는 금기와 규범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집요한 훈련이 반복되는가? 숙제와 시험과 칭찬과 회유, 매질과 모욕, 성적표와 경쟁, 학교의 이 모든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손을 미리 정해진 규격대로 길들이는 데 바쳐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혹사당하면서 손을 길들인 대가로, 우리는 비로소 손에서 입 사이에 그만큼의 여백을 얻을 수 있다. 쓸모있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34)

 

 

나는 지금 무엇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까?

조각가 안규철은 머리, 손, 발, 의자, 상자, 가방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껍질과 속, 잃어버리기 잃어버리지 않기, 사소한 사건, 그림과 말, 일하기와 놀기, 뉴스, 코미디, 사디즘, 사냥꾼과 토끼 같은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렇진 않다. 그런데도 나는 안규철의 글에 따라 생각해 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니까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는 것'의 필요성, 생산성에 관한 책이라고 할까?

철학은 본래 그런 것일 거라고 짐작해 보았다.

 

 

초상화 속에는 통상 발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더라도 그것은 얼굴이나 손처럼 맨살을 드러내지 않고 구두 속에 감춰진다. 옷 속에 감춰야 할 동물적인 과거를 상기시키는 부끄러운 신체의 일부로서, 발은 이런 일에서 자신을 드러낼 자격이 없다. 그는 묘사된 인물의 정체성과 별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생각하는 발, 67)

 

집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아나는 길들, 그 흘러가는 선 위에 정지된 점을 찍어두는 일과 같다.(길 위의 집, 76)

 

 

안규철은 자주 질문을 만나게 해 준다.

 

 

우리에게는 왜 사물의 뒷면이 보이지 않는가? 사물은 어째서 늘 자신의 앞면만을 보여주고 뒷면을 보여주는 법이 한 번도 없는가? 우리에게서 사라진 그 사물의 뒷면이 가버리는 곳, 그 보이지 않는 뒷면들이 머무는 나라는 어디인가?(118)

 

 

안규철이 그렇게 가르쳐준 대답은 아니지만, 나는 그래서 어떤 것들은 오래 기억되거나 잊히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안규철은 조각가이므로 이런 글들과 함께 자신의 조각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생각으로 그 조각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