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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림과 사진

마티스 〈댄스〉

by 답설재 2022. 9. 12.

출처 : https://blog.naver.com/paraparis/10176276593

 

 

 

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본 듯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때는 교과서에서 봤고 그 사진이 아주 작았다고 기억하지만 불분명합니다.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장을 할 때는 여러 번 봤습니다. 중고등학교 미술 검정 교과서 발행 허가를 전결하며 '여기도 있네' '이 책에도 있네' 했습니다.

오래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

잠시 '이런 그림이야 아이디어만 가지면 웬만한 사람은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 않아?' '마티스가 그리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그렸겠지?' 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에게 마티스는 그런 화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우환 선생의 에세이를 읽고 아득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예술에 대해, 그림에 대해, 화가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최근에야 겨우 화가라는 것에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다빈치가 자기를 학자니 뭐니 하지 말고 화가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화가이기, 그림이기는 하나의 단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명료한 형태로 제시해준 이가 마티스라고 할 수 있다. 마티스는 아마도 미술사상 화가를 제 몫을 하는 하나의 존재로 만든 최초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이우환 선생의 설명입니다(《여백의 예술》2014 현대문학).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티스의 그림 특히 〈댄스〉〈실내〉 등의, 중기에서 만년의 종이 오리기 그림에 이르는 많은 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그들이 무언가의 지시물이 아니고 그림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한 장의 작은 캔버스 위에 이뤄진 일이 자연이나 세계라는 단어와 대등할 만큼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림이란 다른 장르로는 설명되지 않는, 바로 화면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신천지이다.

거창하고 의미심장해 보이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해, 마티스의 〈댄스〉는 그 얼마나 얼빠지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의미하며 싱거운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육중한 의미의 부담감이 초래하는 시각의 음울에서 그림을 풀어주고, 상쾌하게 열린 창처럼 화면의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의 거의 모든 그림이 신학이나 문학, 사회학의 설명도說明圖 아니면 대용품이었거나 자연이나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삽화적인 부수물, 종속적·이차적二次的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마티스의 출현은 화가에게 가히 하나의 혁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에세이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드디어 보는 사람의 눈길은 의미의 벽(회화)에서 해방되어 열린 창처럼 싱그러운 그림 앞에 자유로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의미의 강요를 좋아하는 노예 근성 소지자들은 마티스의 그림 앞에서 정녕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얼마나 맥 빠진 시원찮은 그림이냐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니체에 곁들여서 말하자면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자유'인 것이다. 마티스의 그림이, 아니 회화가 없는 그림이 어째서 그렇게 멋있을까. 그것이 자유인에게 가해진 숙제나 다름이 없다. 역으로 마티스의 그림은 자유롭게 보는 일이 어려움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주제넘지만 이제 저 그림이 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티스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그림, 마티스가 그리지 않았다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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