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등심을 찡하게 달려가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혼이 뒤흔들어진다. 화면 바닥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전파가 보는 자에게 잇따라 밀려온다. 보고 있다기보다 어느 틈엔지 저쪽이 쏘아보고 있다. 외면하는 것도 눈을 내리까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기백에 찬 눈초리에 홀리고 있는 사이에 말할 수 없는 깊은 비애에 가까운 투명감이 온몸 가득 퍼져나간다. 일상의 진흙 밭에서 뭔가 숭고하고 아득한 세계로 떠올려지는 것 같다.
이우환의 에세이 '여러 작가들' 중 '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에 부쳐' 첫머리(이우환 《여백의 예술》현대문학 2014)에서 이 글을 읽다가 중단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다.
이우환의 설명 중에서 두 군데를 옮겨 써 두고 싶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왼쪽 아랫단에 한들한들 막 피어난 꽃 한 송이, 그리고 오른쪽 윗단에 지금이라도 터질 듯한 꽃봉오리, 그들을 잇는 것처럼 오른쪽 아래에서 한 줄기 가지가 왼쪽 꽃을 향해 비스듬히 치닫다 도중에서 한순 돌리고 위로 뻗어, 한순간 끊기지만 가장자리 바로 앞에서 구부러져 오른 위쪽 봉오리에 연결되어 있다. 그 외는 상하 두 송이 꽃 아래 각각 어린 곁잎과 그들을 중앙의 가지로 연결시키는 작은 가지가 그려져 있을 뿐, 오른쪽 하단에 있는 빠다샹젱의 사인과 주인朱印을 합쳐도 화면은 극히 단순하면서 청초망양淸楚汒(?茫)洋, 고절적막孤絶寂寞하다. 모든 것이 한 자루의 붓만으로 그려져 있고 세 번 정도 농도가 다른 묵이 가해져 있을 뿐이다. 참으로 여백의 그림이다. 그런데도 화면은 스케일이 있으며 텅 비어 있으면서도 무언가가 차 있고 생명감으로 약동하고 있다. 동양화의 용어를 쓰자면 화면에 기운氣韻이 생동하고 신기神氣가 돈다. 확고하고 절묘한 컴포지션이 한층 더 그 느낌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
일필, 일획이 정신이라는 피가 스며 있듯이 선명하며, 화면에 팽팽한 공기가 떠도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얀 화지에서 그림을 읽는 안력眼力, 급소를 꿰뚫어보고 극히 적은 행위로 그것을 휘어잡는 필력의 대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샹젱이 도달한 화경을 생각할 때, 그 생애가 너무나도 처절하고 고독한 투쟁의 나날이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빠다샹젱. 섣불리 명조의 왕손으로 태어난 탓에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쓰디쓴 고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청조淸朝에 쫓겨 굶주림과 광증에 시달리면서 세계를 배우고, 마음을 갈고닦아 살아남은 사람. 사회에서 내쫓기고 사람들이 거부하면 할수록, 샹젱은 유랑의 길을 확대하고, 작화作畵에서 전인미답의 흔들림 없는 초절超絶한 우주를 추구해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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