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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림과 사진

빠다샹젱(八大山人) 〈목련도〉

by 답설재 2022. 9. 23.

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등심을 찡하게 달려가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혼이 뒤흔들어진다. 화면 바닥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전파가 보는 자에게 잇따라 밀려온다. 보고 있다기보다 어느 틈엔지 저쪽이 쏘아보고 있다. 외면하는 것도 눈을 내리까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기백에 찬 눈초리에 홀리고 있는 사이에 말할 수 없는 깊은 비애에 가까운 투명감이 온몸 가득 퍼져나간다. 일상의 진흙 밭에서 뭔가 숭고하고 아득한 세계로 떠올려지는 것 같다.

 

이우환의 에세이 '여러 작가들' 중 '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에 부쳐' 첫머리(이우환 《여백의 예술》현대문학 2014)에서 이 글을 읽다가 중단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다.

 

 

 

 

출처 김종운 ; 카카오스토리

 

 

 

이우환의 설명 중에서 두 군데를 옮겨 써 두고 싶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왼쪽 아랫단에 한들한들 막 피어난 꽃 한 송이, 그리고 오른쪽 윗단에 지금이라도 터질 듯한 꽃봉오리, 그들을 잇는 것처럼 오른쪽 아래에서 한 줄기 가지가 왼쪽 꽃을 향해 비스듬히 치닫다 도중에서 한순 돌리고 위로 뻗어, 한순간 끊기지만 가장자리 바로 앞에서 구부러져 오른 위쪽 봉오리에 연결되어 있다. 그 외는 상하 두 송이 꽃 아래 각각 어린 곁잎과 그들을 중앙의 가지로 연결시키는 작은 가지가 그려져 있을 뿐, 오른쪽 하단에 있는 빠다샹젱의 사인과 주인朱印을 합쳐도 화면은 극히 단순하면서 청초망양淸楚(?茫)洋, 고절적막孤絶寂寞하다. 모든 것이 한 자루의 붓만으로 그려져 있고 세 번 정도 농도가 다른 묵이 가해져 있을 뿐이다. 참으로 여백의 그림이다. 그런데도 화면은 스케일이 있으며 텅 비어 있으면서도 무언가가 차 있고 생명감으로 약동하고 있다. 동양화의 용어를 쓰자면 화면에 기운氣韻이 생동하고 신기神氣가 돈다. 확고하고 절묘한 컴포지션이 한층 더 그 느낌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

일필, 일획이 정신이라는 피가 스며 있듯이 선명하며, 화면에 팽팽한 공기가 떠도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얀 화지에서 그림을 읽는 안력眼力, 급소를 꿰뚫어보고 극히 적은 행위로 그것을 휘어잡는 필력의 대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샹젱이 도달한 화경을 생각할 때, 그 생애가 너무나도 처절하고 고독한 투쟁의 나날이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빠다샹젱. 섣불리 명조의 왕손으로 태어난 탓에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쓰디쓴 고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청조淸朝에 쫓겨 굶주림과 광증에 시달리면서 세계를 배우고, 마음을 갈고닦아 살아남은 사람. 사회에서 내쫓기고 사람들이 거부하면 할수록, 샹젱은 유랑의 길을 확대하고, 작화作畵에서 전인미답의 흔들림 없는 초절超絶한 우주를 추구해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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