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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리운 제라늄

by 답설재 2022. 4. 17.

사진 출처 : 《봄비 온 뒤 풀빛처럼》 https://blog.daum.net/asweetbasil/17949051

 

 

 

'이쁜준서' 님 블로그 《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는 화초 얘기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라늄 이야기가 등장해서 그 블로그 검색창에 제라늄을 넣어봤더니 스물네 가지쯤 올라와 있었습니다. 단어까지 치면 아마 수백 개가 될 것입니다.

'하필 제라늄을 왜?'

제라늄 화분을 '옥상정원'에서 월동시켰는데 지금 아주 고운 꽃이 피었다고 해서 '그게 본래 그런(기특한! 든든한!... 그런) 녀석이었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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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사였을 때는 '1인 1화분' 시책이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1인 1화분'?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한 학년 올라가면 교실이 바뀌고, 그 교실 환경을 그럴듯하게 조성하면서 창가에는 아이들이 가져온 화분을 올려놓곤 했지 않습니까?

초임의 산촌 학교에서는 1인 1화분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분이라뇨. 그곳에는 화분 있는 집이 눈 닦고 봐도 없고 아예 화분 파는 가게도 없었습니다.

5년 뒤 읍내 번드레한 학교로 전근을 가자마자 1인 1화분으로 공부하기 좋은 교실을 꾸미라는 말을 듣고 꽤나 걱정을 했는데 '어?' 내가 그 말을 한 이튿날 아이들은 대부분 1인 1화분을 갖고 등장했습니다.

 

특징이라면 앙증맞은 붉은 꽃이 피는 선인장 종류는 고급이었다는 것, 그 선인장 같은 화초를 제외하면 다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고 같은 것들이 있어도 얼른 눈에 띄지 않았는데 제라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라늄을 가져온 아이가 많구나.'

 

나는 교사 시절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어서 그렇게 화분을 받아놓고는 그만이었습니다. 교장실, 교무실 환경구성도 내가 해야 했고 심지어 학교 지붕에 붙이는 "주체성이 강한 인재 육성"도 페인트로 내가 썼는데 내 키가 작긴 하지만 그 글자 한 자 한 자가 내 키만큼 컸습니다. 나는 정말 해보지 않은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수학경시대회 선수도 내가 가르쳤고, 글짓기 선수도 내가 가르쳤고...... 술도 내가 제일 많이 마셔서 일찌감치 위도 고장 났습니다.

다행히 교실을 방문하는 아이들 어머니 중 어느 분이 "아이고~ 저것들이 물이 먹고 싶어 죽겠다네요~" 하고는 일부러 물을 주곤 했기 때문에 죽어버리는 화초는 없었습니다.

특별한 일은, 방학 때는 마음이라도 좀 한가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풀이 죽은 그것들이 눈에 띄어 '참 성가시구나' 하고 대충 물을 좀 주었는데 제라늄이란 녀석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빨간 꽃까지 피우고 있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서 그 특이한 녀석을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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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가 시작되어 또 그렇게 물을 주고 있는 한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제라늄이 물도 주지 않았는데 꽃을 피웠더라고요."

그 어머니는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은 바쁜 분이잖아요. 제일로...... 그래서 엄마들이 화원에 가서 물을 주지 않아도 죽지 않는 꽃을 달라고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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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제라늄을 검색해봤더니 뭐가 그리 복잡한지...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보들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어서 '세상은 역시 복잡다단하구나!' 하고 돌아섰는데 '가만있어 봐. 제라늄의 꽃말은 뭐지?' 돌아가 봤더니 '치구의 정, 결심'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결심은 결심이지만, 치구의 정? 정은 情이라면 치구는 뭐지?'

어떤 사전에 다섯 가지 치구가 나와 있었습니다.

 

1. 치구(治具) : 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 ②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수단. 법령, 예악(禮樂) 따위.

2. 치구(恥丘) : 남녀의 생식기 언저리에 있는 불룩한 부분. 유의어 : 두덩, 불두덩, 신안.

3. 치구(雉灸) : 저민 꿩고기를 소금, 깨소금, 파, 설탕, 후춧가루로 양념하고 주물러서 구운 반찬. 유의어 : 생치구, 생치구이, 생치적.

4. 치구(馳驅) : ① 말이나 수레를 타고 달림. ② 몹시 바삐 돌아다님. 유의어 : 구치

5. 치구(齒垢) : 이의 표면에 엉겨 붙어서 굳은 물질. 침으로부터 분비된 석회분이 주성분이며, 특히 치경(齒頸)에 많이 생긴다. 유의어 : 이똥, 잇돌, 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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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찾아보고도 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치구의 정'이라... 그게 정(情)이라면 도대체 어떤 정일까?

좀 쑥스러운 정이 될 듯한 2번, 뭐 이런 정도 있을까 싶은 1번, 5번은 제외하고 일단 아주 멋있는 정을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3번이나 4번! 그중에서도 역마살이 두 개나 되어 아주, 아주 분주하게 살아온 내게 그걸 인정해주는 듯한 의미도 들어 있는 4번!

말이나 수레를 타고 달리며 드는 정, 혹은 몹시 바삐 돌아다니며 드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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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운 내 제라늄...

제라늄 꽃이 피어 그 무덥고 답답한 교실을 지키던 내 여름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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