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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고

by 답설재 2022. 4. 27.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요(I have come to say goodbye)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옷과 마찬가지로 붉고 차양이 넓은, 순례자가 쓰는 모자 비슷한 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 바로 옆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멀리 있는 듯 느껴졌다. 그녀의 멍한 눈길이 나를 관통하여 뒤쪽으로 나아갔다. 제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으니 언제든 원하시면...(I haveleft my address and telephone number, so that if you ever want...) 나는 문장을 완성할 수 없었고,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도 몰랐다. 카타리나 또한 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언젠가(At one point),라고 운을 떼더니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말을 이었다. 언젠가 빈 방 중 하나를 골라 누에를 키워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않았죠.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고 마는가요!(at one point we thought we might raise silkworms in one of the empty rooms. But then we neverdid. Oh, for the countless things one fails to do!) 카타리나 애슈버리와 이렇게 겨우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여러 해가 지난 1993년 3월, 나는 베를린에서......

 

 

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겼습니다(W. G. 제발트, 창비, 2011, 260).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싶었던가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고 마는 건가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포기하는 건가요?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요."

"...................."

"...................."

"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하고 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