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외롭고 쓸쓸하면

by 답설재 2022. 4. 11.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안토니나 할머니가 예전처럼 칸토 가에서 살고 계실 듯했다. 우리에게 배달된 적십자 엽서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던 할머니는 이른바 전쟁의 시작 직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여전히 금붕어를 매일 부엌의 수도꼭지 아래에 놓고 씻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창틀로 옮겨놓고 신선한 바람도 좀 쐬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긴 문장입니다(창비 2011, 209).

 

더러 서러워집니다.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도 나는 많이 웃습니다.

그러다가 또 금세 외로워집니다.

그럴 때 나는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러지 말고 이럴 것 없이 돌아서고 싶습니다.

아주 잠깐, 사람들이 그곳에 그대로 있어 손 다 놓고 돌아온 나를 아무 말 않고 받아들여줄 것 같은 순간을 느낍니다.

그런 두어 순간이 마음 한켠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없으면 나는 외롭거나 서럽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냥 멍청할 것입니다.

본래 이렇게 외롭고 서러운 것인 줄 알 것입니다.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벚꽃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던 날  (0) 2022.04.16
글을 쓰는 일  (0) 2022.04.13
"March with Me" etc.  (1) 2022.04.08
지난 3월의 눈  (0) 2022.04.03
거짓말로 진실 만들기  (0)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