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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사기꾼 아저씨의 요지경

by 답설재 2021. 3. 31.

 

 

 

 

아버지께서 요지경 구경을 허락하신 건 우리가 참으로 무료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결과였을까?

'이 세상에는 이 벽지 같은 곳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다른 곳이 너무나 많아서 요지경 같다는 걸 알아두어라.'

 

그때 나는 요지경이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와 있다.

'알쏭달쏭하고 묘한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설명은 본래의 요지경을 설명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집 살림은 요지경이야"라거나 "세상은 혼탁한 요지경 속"이라고 할 때의 그 요지경이어서 이 비유적 설명을 읽어봐야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그 요지경이 뭐지?'

다른 하나의 설명은 '확대경이 달린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그 속의 여러 가지 그림을 돌리면서 들여다보는 장치나 장난감'. 이게 기본 의미이다. 기본 의미? 그렇다면 요지경이란 도대체 어떤 그림을 들여다보는 도구인가? 요지경은 결국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이 기본 의미로써도 우리가 어떤 것을 보게 될는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도대체 어떤 장면을 들여다보게 되는가?

나는 그게 지금도 궁금하다.

 

그 시골 구석으로 찾아들어온 요지경은 별 것도 아니었다.

그걸 들여다본 나는 허탈한 가슴으로 말없이 돌아섰다. 아이들로부터 동전을 받아 챙기는 그 키 큰 남자가 진짜 요지경을 잘 모르는 바보가 아니면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로부터 꼬박꼬박 돈만 챙기는 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사기꾼의 요지경은 안 봐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미국 뉴욕의 번화한 거리 이곳저곳, 가슴과 엉덩이가 지나치게 커서 힘겹게 안고 다니는 그 거리의 여인들 정도의 사진이 맥없이 이어지고 있어서('미국 미국 하더니 이런 곳일 줄 내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 그 요지경이라는 걸 들여다보던 나는 도중에 사기꾼에게 이의를 제기할 뻔했다.

"사기꾼 아저씨! 이건 아니잖아요! 얼른 진짜를 보여줘 봐요!"

그렇지만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나에게 배당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느낌은 들었지만 혹 핵심적인 마지막 몇 장면에 그 요지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기꾼은 끝내 그 기대를 채워주지 않았고 말없이 내 팔을 움켜잡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나의 그 허탈감은 이후 학교급마다 "이곳이 뉴욕!"이라며 보여주는 흑백사진에 대해 시큰둥하게 만들어놓았다.

"이건 아니야! 이렇진 않아! 세상 어딘가에 요지경이 있을 거야."

 

나는 아직도 그 요지경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권력 좀 쥐었다고 미친 것처럼 구는 사람의 모습이 요지경일까?

아니지, 돈을 엄청 벌었다고 세상이 완전 제 것인 양 날뛰는 녀석의 모습일까?

아니지, 그만해도 많은 것 같은데 더욱 허덕이는 녀석의 모습?

아니야, 부모형제를 이용해 처먹은 녀석?

아니야, 부모형제를 배신하고도 뭘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녀석?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시시한 것들이 요지경일 리 없어!

어쨌든 요지경은 이런 쓰레기나 거지 같은 것들의 모습일 리가 없어!

요지경 세상은 이런 것들의 세상일 리가 없어!

'알쏭달쏭하고 묘한 세상일'이라는 게 더럽고 치사하다는 의미는 아닐 거야.

"세상은 혼탁한 요지경 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혼탁한 요지경 속"이란 "혼탁하지 않은 요지경 속"도 염두에 둔 말이 아니겠는가.

 

요지경은 여전히 궁금하지만 나는 기다리다가 지쳤다.

제대로 된 요지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날 것 같다.

아, 생각날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던 요지경 세상...

 

그런 세상이 책에는,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어느 책에는 나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