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저승 가는 길

by 답설재 2021. 3. 23.

 

 

 

저승 가는 길을 그려봅니다.

저승은 분주한 곳이 분명하지만 경계가 삼엄하고 조직이 치밀한 한 곳이 아니라 쓸쓸하거나 썰렁하다 해도 이미 그곳을 찾아가야 할 사람은 찾게 되어 있으므로 무슨 대단한 환영식 준비하듯 여럿이 나를 데리러 오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승으로 오라!"는 그 통지를 무시하면 어떤 조치가 내려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시지프의 신화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가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가야 하고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까만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기묘하게 화장을 한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한두 명일 것이고, 십중팔구 혼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안내될 테니까(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내 엄마도 갔고, 중학교 1학년 봄 소풍 때 전철역 공사장 가스 폭발사고로 죽은, 죄짓는 방법도 몰랐던 내 제자 혁준이도 간 걸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아주 간단명료할 그 통지서에 적힌 대로 가면 될 것입니다. '레테'라는 강이 정말로 있다면 흔히 그렇게 묘사했듯이 막막한 느낌의 강가에 혼자 타면 딱 맞을 나룻배가 있어서 그걸 타고 석양에 그 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후련하게도 이승의 일들은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뭘 알겠습니까?

다른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마다 그곳으로 가는 수단이 다르거나 지역, 나라마다 다를지도 모릅니다.

선택하든 주어지든 어차피 각자 한 가지 방법으로 가게 될 것이어서 굳이 그 수단이나 방법을 미리 다 파악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파악해봤자 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문학가들이 더 잘 압니다. 그들은 심지어 젊은 작가의 경우에도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어서 저승 가는 길에 대해서도 많이 아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3년 전 초봄에 본 『이슬라』라는 소설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웬만하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장 그 소설에서 하마터면 저승으로 갈 뻔했던 부분을 옮겨 쓰겠습니다.

 

 

앉은 채로 얼마나 자고 있던 것일까. 찬기를 느끼며 깨어난 내 귀에 먼 곳으로부터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이 오고 있지만 아직 밤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무수히 박힌 별들은 하늘이 구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야는 모로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뱀이 쉭쉭대는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천이 땅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형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누였다. 사구의 끝자락에서 검은 카누 열 대가 다가오고 있다. 모래는 부드러운 물결 모양을 이루며 갈라지고 합쳐져 카누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다가온 카누에 술사가 올라서는 것이 꿈속의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이탕카가 지팡이를 들자 카누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쪽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모래에 묻힌 발이 뽑혀 나오지 않았다. 카누가 내 옆을 스쳐 갈 때 하늘 망토가 펄럭이며 내 얼굴과 상반신을 감쌌다. 부드러운 천 속에 둘러싸인 나는 수놓은 문양과 하늘의 별들이 하나로 겹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득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하늘 망토는 다른 우주로 통하는 문이고 늙은 술사는 건너가는 중이라고. 지금이 그 여행에 동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여행, 죽음으로 가는 길이 바로 이 카누에 있다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부드러운 감촉을 남긴 채 하늘 망토는 사라졌고 내 발은 여전히 사막 속에 남았다.

이탕카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모래 전체가 살아 있는 짐승의 털처럼 부르르 떨고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카누의 모습은 어느덧 점처럼 작아졌다.

"기다려요! 물어볼 것이 아직 많은데……."

술사의 모습이 사라지는 방향에서 태양이 솟고 있다. 떠오르는 빛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흑점처럼 박힌 검은 카누를 향해 나도 데려가달라고. 이 이상한 세계에 남겨두지 말라고 애원했다.

털썩 주저앉은 나는 이상한 설움에 복받쳐 소리 내어 울었다. 어느새 지평선을 떨치고 일어난 태양이 힘과 권능을 확인하듯 어둠을 몰아냈다. 이상한 후회 같은 것이 밀려왔고 동시에 그 배에 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조그마한 카누 형태의 죽음이 내 손안에 들어 있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 김성중(중편소설) 『이슬라』(『現代文學』 2018. 2월호 138~211) 중에서.

 

 

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과 같진 않고, 아니 장면은 전혀 달랐지만 부드러운 감촉의 망토처럼 고운 치맛자락이 내 얼굴을 덮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십 대 아니면 이십 대 혹은 삼십 대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치맛자락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내가 죽겠구나, 이 치맛자락이 내 얼굴부터 몸 전체를 덮으면 나는 이제 죽는 것이구나 싶은 강력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 부드러운 감촉의 치맛자락이 얼굴을 덮는 순간 나는 그냥 평화로웠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얼른 그 느낌을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아쉽기도 했고, 잠이 깨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내 아내는 나와 결혼하고 나서 걸핏하면 내 명이 짧아서 걱정스러웠다고 했고, 어느 (재수 없는) 점쟁이는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남편이 너무 일찍 죽어서 어려움이 많겠다"고 해서 "형편없긴 해도 아직 살아 있다"고 했더니 "그 참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점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내 목숨에 대해서만 의심스러워하더라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했고, 내 명이 너무 짧다는 그 걱정이 해소된 일에 대해서는 알쏭달쏭하게만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때의 그 일(죽음의 순간에 대한 느낌)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그 기회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다가올는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나는 그 기회가 다시 오면 이번에는 작정하고 따라갑니다.

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