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아름다움이란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소설 《달과 6펜스》(서머싯 몸)에서 본 말입니다(민음사, 2013, 191).
그러고 보면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좀처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랄까, 마음에 두었던 오로지 그 한 명의 소녀만 아름다워서 다른 걸 보고, 가령 길가의 민들레에게조차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사랑은 말할 것도 없었고, 행복이란 것도 그랬습니다.
행복, 어떻게 그 가득한, 벅찬, 난해한 말을 내 이 누추한 생에 갖다 대겠는가, 앞으론들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싶었습니다.
이 블로그를 하면서 손님들이 찾아와 내가 어떤 인간인 줄도 모르고 자기네들 같은 줄 알고 "행복하라"고 했을 때 나는 정말 매우 당황했습니다.
댓글 달고 답글 다는 시간을 단축하고 싶은 나는 매번 뭐라고 대충 써놓고는, 나의 경우 죽기 전에 과연 그 행복이란 걸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도저히 답할 수 없는 문제로 번민을 거듭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렇습니다.
이제 매듭 지을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나의 행복은 더욱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나는 그 행복이란 것에 대해 조금도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표가 나지 않게,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버무려 답하고 늘 하던 다짐만 거듭합니다.
'절대로 이분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동안 내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조치로써 이른바 오프라인을 요구하면 나는 깊이 고민하다가 결국은 응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닫았습니다. 그 교류를 폐쇄해버렸습니다.
엉뚱한 사정을 만들어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거나(그 기간은 상대방이 정하게 되죠. 어떤 이는 몇 년을 두고 연락을 하니까요) 그쪽도 기분 나쁠 게 분명한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어쨌든 이 빈한한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아직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라는 것 때문에 죽살이를 치고 있습니다.
혹 누가 내려다보면 "불치병(혹은 기저질환)을 가진 저 인간은 엎친 데 덮쳐서 거의 갈 데까지 갔구나" 할지도 모르겠고 그 옆자리의 어느 분은 "목숨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진 않으니까 조금 더 지켜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하루 감염자 수가 몇십 명이더니 백 명을 넘고 이백 명, 삼백 명, 어느새 오백 명을 넘고 있습니다.
마치 누가 조정을 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제발 저 수치 좀 줄어들게 해주세요"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백 명은 끔찍하고 한두 명은 외면할 수 있나? 내가 지금 착각을 하는 건 아닌가? 그 오백 명 속에는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고, 한두 명 속에는 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인가? 오랫동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동안 마침내 자신이 마치 수치를 다루는 사람인양 착각하게 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