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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글싹

by 답설재 2020. 11. 15.

 

2020.11.15. 밤. DAUM 이미지(부분)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 말 한마디의 영향으로 아이의 장래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해볼 걸 싶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간단합니까. 더구나 이미 몇십 년 전의 일이라면?

선생님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 하면 곤혹스럽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건 걸까 싶어서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이 작가에게 50년 전의 나는 또 무슨 짓을 한 것일까요.

 

 

 

글싹

 

 

김 종 란

 

 

엄마한테 등짝을 맞고 쫓겨났어요.

장독 뒤에 숨어서 울었어요.

옥잠화 새싹이 자꾸만 고개를 내밀어요.

그래서 그만 웃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국어 시간, 동시 단원의 수업이 끝난 후 동시 쓰기가 있었다. 제목은 ‘봄’ 이었다. 동시가 뭔가. 도대체 뭐를 어떻게 쓰라는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눈만 끔벅대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그러셨을 것이다. 자신이 본 것과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쓰면 된다고, 세상 모든 게 다 동시가 된다며 우리들을 재촉했을 것이다. 어찌어찌 긁적이다가 나도 공책을 냈다.

옥잠화 새싹이 자꾸만 고개를 내밀어요… 부분을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읽어주던 선생님은 그날 수업을 마친 후 내 공책을 들고는 어느 교실로 나를 데려가셨다. 4학년부터 들어가는 문예반에 3학년인 내가 들어간 건 순전히 그놈의 ‘옥잠화 새싹’ 때문이었다.

글깨나 쓴다는 고학년들이 모인 문예반에서 유일한 3학년인 내가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는 수준도 못되었던 나는 담임선생님의 명령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문예반을 가야 했다. 칠판에 오른 제목을 보며 진땀을 흘릴 때 주변에서 또닥또닥 튕기듯 글을 쓰는 연필 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연필에다 수차례 침을 묻혀 잘근대다가 연필만 퉁퉁 불리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완성된 글을 문예선생님께 내는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나는 ‘옥잠화 새싹’을 원망하다가 새싹을 짓뭉개버리기도 했다. 겪은 일을 솔직하게 쓰면 동시가 된다는 담임선생님의 부추김에 넘어가 엄마한테 맞은 일까지 쓴 그날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짧은 시를 운문으로, 긴 글을 산문으로 부르며 내 나름 운문과 산문을 흉내 낼 수 있었던 것도 ‘옥잠화 새싹’ 덕분이 아니었을까.

솔직한 글이 믿음과 목표가 되어 나의 글은 더욱 솔직해졌다. 송아지를 밴 암소한테 걷어차여 허리를 다친 엄마, 나락을 훔쳐가다 들킨 동네 아저씨, 농약을 치다가 농약에 취해 논둑에 쓰러진 아버지, 꼭꼭 숨겨뒀다 밤에만 빨래하는 언니들의 헝겊기저귀, 소가 내빼서 동네 사람들과 밤새 찾던 일…. 때로는 솔직함을 넘어 과감한 폭로가 되기도 했다.

고학년들 틈에서 원고지를 들고 쭈뼛거릴 때마다, 얘는 우리 중 가장 어리니까 먼저 읽어보자던 문예선생님, 그것이 미숙한 내 글에 대한 배려였다는 것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빨간 펜의 마법으로 이곳저곳 몇 번을 고쳐 번듯한 글이 되게 해주는 선생님, 글에 담지 못한 내 마음까지 쓰윽 들춰내며 알아주던 문예선생님 앞에서 나는 얼마나 설레고 기뻤던가.

야들아, 여를 이래 바꾸믄 글이 어떠까, 야는 우예 이런 생각을 다 하겠노, 야는 참말 대단해여, 선생님은 우리들을 빙 둘러앉히고, 우리들에게 물어보듯 글을 고쳐주며 뭘 쓰든 우리를 치켜세웠다. 빨간 펜의 흔적이 남은 원고지를 되돌려 받으며 나는 선생님을 품은 듯 부끄럽고 황송했다. 농촌에서 한정된 터전을 맴돌던 내 글이 오죽했을까마는, 나는 열 살 때 글쓰기를 배우기보다는 글 쓰는 기쁨을 먼저 배운 건지도 모른다.

 

올해도 아파트 현관 앞 화단에서 옥잠화 새싹을 발견했다. 나는 열 살 계집아이처럼 쪼그려 앉는다. 엄마한테 얻어맞고 쫓겨나서는 항아리에 기대어 질금질금 우는 아이가 된다. 장독대 주변에서 꼬물꼬물 솟아나는 여린 싹을 보느라 쫓겨난 설움을 잊는다. 그렁그렁 눈물 너머로 간질이듯 솟아오른 옥잠화 새싹을 보며 배시시 웃는다. 이제 열 살을 다섯 번쯤 뛰어넘어 세상만사 감흥이 식어 가는데 여린 새싹 몇 포기에 콧속이 시큰해진다.

내 글의 시작은 옥잠화 새싹이다. 어떤 일은 거창한 목표나 계획으로 출발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스침이나 인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놓치거나 놓고 사는 것들, 잊어버리거나 잃고 사는 인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누군가의 싹이 될 뿌리를 걷어치우거나, 싹을 틔울 씨앗을 뭉개버린 적은 없었던가. 나의 한 마디가, 내 손길 한 번이 누군가의 출발을 북돋아줬더라면 그의 목표가 더 견고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아직은 글쓰기의 끈만은 놓치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려 한다. 칠판에 쓰인 제목을 보며 원고지 묶음 앞에서 갖던 3학년 때의 떨림을 가끔은 모니터 앞에서도 되풀이한다. 문예선생님께 내 글을 넌지시 내밀 때의 설렘을 되찾으려 한다. 세상에서, 혹은 사람에게 혼난 날, 때로는 세상과 사람한테서 받은 뻐근한 기쁨, 말로는 감당할 그런 일들로 가슴이 벅차오르면 모니터와 마주한다.

토닥토닥 자판에다 글의 씨를 뿌리고 파릇파릇 글의 싹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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