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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끔만 예쁜 아이들

by 답설재 2020. 11. 10.

 

 

 

무슨 큰 일이나 한다고 자부하며 매달 장애인을 돕는 성금을 내고 있었는데 그 단체의 복지사가 전화를 하더니 '일대 일' 결연을 맺지 않겠는지 물었습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더니 사진을 보내주면서 돈은 매달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 간혹 직접 만나주면 더 좋지만 그러지 않아도 좋다, 명절 때나 성금을 조금만 더 내면 된다, 등등 조건들은 다 좋은데, 성하지 않은 그 몸을 보니까 도저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면서 종전처럼 성금만 내겠다고 했더니 '선뜻' 좋다고 했습니다.

선뜻? 그 복지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선뜻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날 그 시간의 일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남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가소롭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버니스의 차 안에서는 낡은 소파에서 나는 것과 같은 지저분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앞좌석의 등받이를 가로질러 매달린 두꺼운 회색줄을 잡은 채, 마치 역마차나 몰고 있는 듯이 위아래로 펄쩍펄쩍 튀었다. 공기는 작은 겨이삭 줄기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더러운 먼지로 가득 차있었는데, 누군가가 우리한테 그것이 원자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둘이서 토닥토닥 싸우기도 하고 말과 공동묘지의 숫자를 세기도 하면서 오는 동안, 엄마는 우리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엄마에게 숲 속 도로변의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세워 달라고 부탁하자, 엄마가 차를 세우고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거기 있던 아줌마가 우리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자, 엄마가 공허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가끔은 그렇죠."

 

 

《하우스키핑》이라는 소설에서 보았습니다(매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랜덤하우스, 2008, 267~268). 어머니라는 여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보고 "가끔은 예쁘다"고 합니다. 늘 예쁜 것이 아니라 가끔만 예쁘다는 것입니다.

 

필립 시먼스라는 사람은『소멸의 아름다움Learning to Fall-The Blessings of an Imperfect Life』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김석희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2, 162쪽).

 

"우리는 남들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 대신 형식적인 선량함을 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노숙자를 돕기 위해 쉽게 수표를 끊지만, 그들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만화 <피너츠>에서 라이너스가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잊을 만하면 교사들이 어린이집 아이들을 두들겨패주었다는 뉴스를 텔레비전에서 보곤합니다. 어제였던가, 이번에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쥐어박고 홀대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 행위를 동영상으로 확인하는데도 뭐라고 변명하는 뻔뻔함은 그 어린이집 교사만의 뻔뻔함입니까?

'우리'는 '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뉴스는 자꾸 들려옵니까? 그 '우리'는, '나'는  누구입니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분들도 교사들이죠? 교사가 임용될 때는 가슴이 벅차서 아이들을 사랑하겠다고 굳게 다짐했겠지요? 할 일도 생기고 돈도 받게 되었으니까요.

혹 내 기분이 좋을 때만 아이들을 사랑하겠다는 건 아니었을까요? 저 이야기 속 어머니처럼 "가끔만."

혹 이게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성인들의 기본 성향은 아닙니까?

아니라면 그걸 뭘로 보여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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