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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서머싯 몸이 설명한 과일 그림

by 답설재 2020. 12. 7.

베란다에서 진찰실로 통하는 문간에서 그는 잠시 발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과일을 그린 정물화입니다. 의사에 진찰실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집사람이 응접실에는 절대 걸어놓을 수 없다고 하지 뭡니까. 너무 외설스럽다나요.」

「정물화가 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방에 들어갔다. 금방 그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망고, 바나나, 오렌지, 그 밖의 이름 모를 과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림이었다. 언뜻 보면 조금도 이상할 데가 없는 그림이었다. 무심한 사람이라면 후기 인상파의 전람회 같은 데서, 잘 그렸긴 하지만 이 유파를 대표할 만한 작품은 못 된다고 여기고 그냥 지나치고 말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도 자꾸 그 그림이 기억에 떠올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마도 좀처럼 그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색채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그것들이 불러일으켰던 착잡한 감정을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두운 군청 빛깔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정교한 조각을 아로새긴 유리 그릇처럼 흐릿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비로운 삶의 박동을 암시하듯 어렴풋한 광택을 지니고 있었다. 자줏빛 계통의 색채도 있었다. 이것들은 썩은 날고깃덩이처럼 섬뜩하면서 한편으론 헬리오가발루스가 통치하던 로마 제국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려주는 뜨거운 관능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또 붉은 빛깔들, 호랑가시나무 열매처럼 강렬하면서도──이 열매는 영국에서 크리스마스와 눈과 흥겨움,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떠올린다──한편으로는 무슨 신통력 때문일까, 비둘기 가슴처럼 황홀한 부드러움마저 지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런 색깔들이 있었다. 짙은 노란색들, 이것들은 지나친 열정 때문에 희미해져 봄날처럼 향기롭고 반짝이는 산골짝 개울물처럼 투명한 초록색이 되어 있었다. 고뇌에 찬 어떤 상상이 이러한 과일들을 그려냈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그것들은 헤스페리데스가 지킨다는 폴리네시아의 정원에나 열릴까. 거기에는 이상하게도 생명이 숨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이 세상 만물의 형상이 영원히 고정되기 전, 어두웠던 창세기 시대에 창조된 것처럼 말이다.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열대의 향기가 진동했다. 그것들은 자기네 고유의 어두운 열정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에 걸린 과일들이라고 할까. 맛을 보면, 신만이 아는 영혼의 비밀과 상상의 신비로운 궁전으로 통하는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을 품고 있어 그것들은 명랑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먹으면 사람이 짐승이나 신으로 변해 버릴 것 같았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모든 것, 행복한 인간관계와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기쁨에 집착하는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는 경악하여 움츠러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들에는 또한 무섭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선악과(善惡果)처럼, 미지의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블로그 Pongtree에서 캡쳐함.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옮겨써 본 문장입니다(민음사, 2013, 299~301).

몸은 이 소설을 쓰려고 타히티를 방문하기도 했다는데 해설을 보니까 소설에서 그가 보여준 화가(그림)는 고갱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있는 작품들을 대조해보았으나 설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 한 폭의 그림을 찾을 수가 없고, 부분적으로 그 설명에 적합한 그림은 몇 있었습니다.

전문가라면 더 깊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림을 볼 줄 아느냐 아니냐는 문제와는 다른 분석일 것입니다.

고갱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기야 욕심을 낼 일도 아닐 것입니다. 우스개가 되겠지만 고흐, 고갱, 두 화가는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