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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by 답설재 2020. 10. 4.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김연순·박희석 옮김, 현암사 1997

 

 

 

 

 

 

 

이 책을 읽고 '내가 책을 읽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이러다가 죽는가?' '죽음에 가까이 가서 읽을 만한 책이 있는가?' '바라볼 만한 그림이 있는가?' '들을 만한 음악이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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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평론가인 레거가 한 말을 전한 소설입니다. 의미심장한 문장이 끝까지 문단 구분도 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 한 문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술사가가 바로 미술을 망치는 사람이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미술사가는 미술에 대해 너무 많이 떠벌려 미술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미술사가들이 너무 떠벌려 미술은 죽습니다. 여기 의자에 앉아 종종 생각건대, 미술사가가 불쌍한 그들의 무리를 몰고 내 옆을 지나가면, 원, 바로 이 미술사가 때문에 미술에서 멀어지고, 미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안 됐는지 하고 레거는 말했다.(30)

 

어느 문화해설사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안내해 주는 메일을 몇 번이나 보내주었습니다. 문화재를 주제로 한 교과서 문장처럼 잘 정리된 그 메일을 나는 읽지 않습니다. 잘 정리되었지만 재미라고는 단 한 푼어치도 없는 그 글을 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이미 시험을 봐야 하는 학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문화재가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렇습니다. 그 문화해설사가 그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 문화재를 외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오 가까이 되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박물관으로 온다. 최근에는 의외로 동유럽에서 많이 왔는데, 나는 며칠을 연이어 조지아에서 온 단체를 보았다. 러시아말을 하는 안내자들이 그들을 전시관으로 몰고 다녔다. 몰고 다녔다는 정확한 표현이다. 이 단체 관람객들은 박물관을 두루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삐 돌아다닐 뿐 근본적으로 전혀 관심이 없었다.(40)

 

나는 1993년부터 2004년 여름까지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자주 경복궁 뜰을 산책하거나 옛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흔히 학생들로 번잡한 곳이었습니다. 전국 각지,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에서 온 단체관람객들이 줄을 지어 다니는 모습은 거의 언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그 태도가 정숙하고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곳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는데 한국의 대통령 YS 때 부수어버렸다”라고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모두들 ‘빨간 모자’를 맞추어 쓰고 단체를 상징하는 깃발을 쫓아다니기에 분주했습니다. 리더는 도착하자마자 단체 사진 몇 장을 찍게 하고는 길을 잃는 관광객이 없도록 단속하는 데 혈안이 되어 “여기가 경복궁이고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그것만 알아두라는 양)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그러면 됐다는 듯 대놓고 “이런 식으로 꾸물대면 남산 케이블카를 타기는 다 틀린 일”이라며 단체행동이 미흡함을 개탄하고는 대체로 ‘성공적으로’ 그곳을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생들은 우둔하게도 단지 자신을 믿는 학생들의 미술에 대한 모든 감정을 아주 쉽게 죽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끄는 소위 죄 없는 희생자들의 박물관 방문은 그 선생들의 멍청함 그리고 의미 없는 수다 때문에 대부분 학생들의 마지막 방문이 되어 버린다. 선생들과 미술사 박물관에 한번 함께 왔던 학생들은 한평생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 모든 어린 학생들의 첫 방문은 동시에 그들의 마지막 방문이 된다. 선생들은 박물관에 와서는 그들을 신뢰하는 학생들의 미술에 대한 흥미를 영원히 없애버린다. 이게 사실이다. 선생이 학생을 망친다. 이것은 진실이며, 수백 년 동안 그래 왔다.(42)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유치원 아이들이 가장 질서 정연합니다. 그 아이들은 아직은 교사의 지휘를 잘 따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앞에 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잘 쳐다보며 전시실을 일주합니다.

그 아이들이 조금만 더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경복궁과 박물관에 익숙한 국민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경복궁과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을 그 아이들은 경복궁 뜰에서 자유시간을 만끽합니다. “얘들아, 박물관에도 들어가 봐야지 않니?” 그렇게 물으면 “유치원 때 이미 다 봤어요!” 하고 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습니다. ‘선생들의 멍청함 그리고 의미 없는 수다 때문에’ ‘죄 없는 희생자들’이 된 우리의 그 아이들……

박물관 전시실의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 점심시간에 짬을 낸 나에게는 그것들 중 어느 한 점만 바라보아도 충분했습니다. 그 시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그렇게 하면 오죽 좋았겠습니까? 유치원에서부터 자유롭게 어느 것 한두 가지, 두어 가지만 보게 했더라면 그 아이들은 두고두고 그 박물관을 찾아갈 터인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연령층을 데리고 가든, 무엇을 배워야 할 사람들을 데리고 가든 그 박물관 전체를 보여줍니다. 저 레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지막 방문’이 되게 해 버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번 경탄에 빠지면 더 이상 그 경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로 인해 그들은 멍청해지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단지 경탄하는 그것만으로도 평생 동안 멍청해집니다. 경탄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없지요 하고 어제 레거는 말했다. 존경하고 중시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탄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더 쉽기 때문이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경탄을 존경하고 중시하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경탄은 멍청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단지 멍청한 사람만이 경탄하고, 영리한 사람은 경탄하지 않습니다. 그는 존경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이해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이 필요한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 정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실제로 완전히 정신을 내놓은 채 피라미드로, 시칠리아 신전으로 그리고 페르시아의 사원으로 여행하며, 감화를 받고 경탄함으로써 더 멍청해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경탄의 상태는 곧 저능한 상태인데, 이러한 저능한 상태에 거의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고 어제 레거는 말했다.(99)

 

그렇기도 하지만 한번 경탄의 대상이 된 인물은 대를 이어 경탄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경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경탄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아직 그를 경탄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우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각 단계의 시험을 치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걸 레거는 멍청하다고 한 것이죠?

 

나는 항상 내게는 음악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은 철학이 그렇다고 생각했고, 뛰어난 최고의 글들이, 또 예술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사랑한 사람의 혼을 빼놓았습니까. 우리는 유일하게 사랑한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애를 먹였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 사람을 괴롭혔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람을 둘도 없이 사랑했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224)

 

가끔 죽음을 앞두고 듣고 싶은 음악, 바라보고 싶은 그림, 혹은 한 번 더 읽고 싶은 글을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작품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며 나중에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음악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한 번 더 듣고 싶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음악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림을 보며 나중에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그 그림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그림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감명을 받은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이제 책을 더는 읽을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될 때 마지막으로 읽고 싶을 만한 작품을 고르지는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레거의 설명에 대해서도 공감하였습니다.

 

나는 홀로 남아 있었고 모든 책과 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습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칸트에게 매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입니다. 셰익스피어와 칸트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소위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어올린 이들도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으며, 위로도 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갑자기 메스껍고 낯설어집니다. 이 소위 위대한 사람들 그리고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글은 모두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습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우리 삶의 중대한 순간에 이 중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에게 언제나 그러듯이 의지할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바로 그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이 모든 중요한 사람 그리고 위대한 사람, 소위 영원한 이들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그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는 혼자이며 큰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225)

 

그동안 나는 내 처지에 맞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을 버렸습니다. 어떤 책은 별생각 없이 버릴 목록에 넣어서 나중에 후회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렇게 버렸어도 괜찮았습니다. 좋았습니다. 아직 갖고 있는 책들은 버리고 싶지 않은 책들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왜 갖고 있어야 하는지 설명하라면 난처한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르한 파묵이 꼭 갖고 있을 만한 몇 권의 책을 쓴 글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나는 그런 책을 정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 목록을 정해보고 싶은 생각은 절실합닌다. 그 목록을 오르한 파묵의 것과 비교할 생각은 아예 없습니다. 그것은 오만일 것입니다.

당장 돌아앉아서 서장을 바라보아도 그런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다시 암담해집니다.

 

이후에도 레거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마침내 레거가 드나드는 오스트리아의 그 미술관에는 가령 고야의 그림 한 장 없다는 등 극렬한 성토를 했지만, 그런 얘기는 나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책을 마지막까지 갖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전개가 섭섭했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 나는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만큼 절실한 생각이 없는 처지이기도 하니까 섭섭해해도 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나에게, 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 섭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