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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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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단편소설) 「아버지가 되어주오」(단편소설)

by 답설재 2020. 8. 29.

천운영(단편소설) 「아버지가 되어주오」

『현대문학』 2020년 8월호(84~104)

 

 

 

 

 

 

읽기에 아주 불편한 소설이 있다. 단편소설 중에 자주 눈에 띈다.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편하게 읽히는데도 나타내고 싶은 얘기는 다 하는구나.' 싶었다. 

 

 

술심부름은 나한테만 맡기셨어. 명자가 받아오는 술이 제일이라 하셨지.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니 뭐니 하겠지만, 난 그 일이 참 좋았어. 술도가에 가면 다들 알아봤지. 서학교 남 선생 딸내미로구나 하고. 병은 딱 반만 채워. 당신 하루 자실 만큼만. 그땐 주전자도 아니고 됫병, 유리 됫병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무거워. 그러니 옆구리에 끼었다가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바닥에 내려놨다 하면서 가지. 그렇게 가다 서다 하다 보면 저만치 아버지가 기다리고 서 있는 거야. 아주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두 팔을 벌리고, 명자가 왔구나, 명자가 왔어, 하시지. 그러려고 보내신 것 같아. 반갑게 맞으려고. 명자가 왔구나, 그 말을 하려고.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명대로 삼칠일이 끝나자마자 길을 나섰다. 따로 기별을 넣지는 않았다. 새벽 첫차를 타고 증조할머니가 왔던 길을 거슬러 쌍암까지 갔다. 아버지는 남대문시장에서 세이코 벽시계를 사 가지고 갔다. 태옆을 한 번 감으면 24시간 지속된다는 괘종시계였다. 정종도 됫병으로 두 병 준비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어 고향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동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할아버지는 그때 안방에서 유과 한 접시를 놓고 술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할머니는 포대기부터 풀어 나를 받아 안았다. 어머니가 먼저 문지방을 넘고 아버지가 뒤따랐다. 할아버지는 술상을 앞에 두고 절을 받았다. 명자가 왔구나,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를 향해, 술 좀 데워 오소, 하고 청했다. 할머니는 안고 있던 나를 할아버지에게 넘기고 술을 데우러 나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술상 옆에 뉘였다. 술상을 사이에 두고 할아버지와 내가, 무릎을 꿇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할머니가 데운 술을 가져왔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술을 따랐다. 아버지는 공손히 받았다. 어머니 앞에는 유과 한 조각이 놓였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눈빛이 좋으니 되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 울었다. 아버지가 생애 처음 받아본 믿음이었다.(99~100)

 

 

* 어머니=명자, 그러니까 위 문단은 지금 어머니(명자)가 화자(나)에게 화자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내용이고, 아래 문단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낳아서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처음 찾아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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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1971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아일보』등단. 소설집『바늘』『명랑』『그녀의 눈물 사용법』『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잘 가라, 서커스』『생강』등. 〈신동엽문학상〉〈올해의 예술상〉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