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4일에 올렸던 자료입니다.
블로그 시스템이 바뀌고나니까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에 띄는 대로 글씨체를 바꾸곤 했는데 본래의 날짜에 올린 것으로 저장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오늘 날짜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료를 보러 오는 분은 끊임없지만, 댓글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으므로 댓글란을 없앴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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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는 칼립소(트로이에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7년간 오지지아 섬에 잡아 두었던 바다의 정령 : 번역자 민희식의 주)의 분부대로 영생(永生)과 그의 조상들의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는, 조상들의 나라를, 그와 동시에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한 순진한 고귀함은 오늘날의 우리에겐 낯선 것이다.
까뮈는 「헬레네의 추방」이라는 제목의 철학 에세이에서 사이렌과 맞선 오디세우스를 그렇게 '평가'했습니다.(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 1993, 육문사, 부록(까뮈의 철학 에세이), 236쪽). 이 인용만으로는 까뮈가 말하고 싶어 한 내용을 알아내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바로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다시 은둔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름다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그 못지않은 사실인데, 그것을 우리 시대는 무시하고자 하는 체한다. 우리 시대는 절대(絶對)와 권위를 얻기 위해 제 자신을 강철로 만든다. 우리 시대는 세계를 남김 없이 연구해 보기 전에 변형시키고, 세계를 이해하기도 전에 세계를 바로잡으려 한다. 무어라 말하든, 우리 시대는 이 세계를 버리고 있다.
이런 글을 읽으면 까뮈의 생각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득함을 느끼게 됩니다.
에세이는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은 모호하다. 모든 것에 자만하고, 하늘까지 솟아오르고, 그리고 결국 공개된 어느 장소에서든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 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보들처럼, 우리에겐 다만 자신의 한계들에 대한 인식 능력과 자신의 상태에 대한 명징한 사랑인 인간의 긍지가 모자랄 뿐이다.
♬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깊고 넓은 것이지만, 프란츠 카프카는 짤막한 소설로써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소설입니다.
「사이렌의 침묵」
- 프란츠 카프카·전영애 옮김, 『변신·시골의사』(민음사, 2009, 1판 47쇄), 208~210쪽.
미흡한, 아니 유치한 수단도 구원에 쓰일 수 있음의 증거.
사이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오디세우스는 귀에 밀랍을 틀어막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했다. 물론 사이렌들에 맞서기 위하여 고래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부터 이미 사이렌들에게 유혹당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이런 것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무엇이든 다 뚫고 들어가니 유혹당한 자들의 격정은 사슬이나 돛대보다 더한 것이라도 깨뜨렸으리라.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 점을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얘길 들었는데도 그는 한줌의 밀랍과 한 다발 사슬을 완벽하게 믿었고 자기가 찾은 작은 도구에 대한 순진한 기쁨에 차서 사이렌들을 마주 향하여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사이렌들은 노래보다 더욱 무서운 무기를 가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침묵이다. 그런 일이 사실 없었기는 하나, 누군가가 혹 그녀들의 노래로부터 구조되었으리라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분명 그녀들의 침묵으로부터는 구조될 수 없다. 자기 힘으로 그녀들을 이겼다는 감정, 거기에 이어지는 만인을 감동시키는 자부심에는 이 지상의 그 무엇도 맞설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왔을 때 그 강력한 가희(歌姬)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이 적수에게는 침묵이어야 필적할 수 있겠다고 믿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오로지 밀랍과 쇠사슬 생각뿐인 오디세우스의 얼굴에 넘치는 행복감을 보자 그들이 노래를 죄다 잊어버렸기 때문이든.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표현해 보자면, 그들의 침묵을 듣지 않으면서, 그들이 노래를 하는데도 자신이 그 노래를 못 듣도록 지켜져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얼핏 먼저 그녀들의 고개돌림, 깊은 호흡, 눈물이 가득 찬 눈, 반쯤 열린 입이 보였는데 그는 그것이 들리지 않게 자기를 감돌며 사라지는 선율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자 그 모든 것은 곧바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가 버렸다. 사이렌들은 그야말로 그의 결단성 안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바로 그녀들 가장 가까이에 갔을 때는 그는 이젠 그녀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그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답게──몸을 뻗치고 틀었으며, 그 섬뜩한 머리카락을 온통 바람결에 나부끼며 바위 위에서 발톱을 한껏 드러내 놓고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오디세우스의 커다란 두 눈이 뿜는 빛을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놓치지 않으려 했다.
사이렌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때 그들은 섬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채로 남아 있었고, 오디세우스만이 그들을 벗어났다.
아무려나 여기에 덧붙여진 이야기 하나가 추가되어 전해진다. 오디세우스는 워낙 꾀가 많아, 워낙 여우 같은 사람이라 운명의 여신조차도 그의 가장 깊은 마음은 꿰뚫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비록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알 도리가 없으나, 사이렌들이 침묵했었다는 것을 정말로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가상의 과정을 다만 어느 정도 방패로써 사이렌들과 신들에게 들이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
카프카의 『사이렌의 침묵』에서도 까뮈의 에세이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입니다.
그의 생각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그때 그랬구나.'
'세이렌이 그때 오디세우스에게 그랬구나.'
♬
김행숙 시인이 『현대문학』 2012년 12월호(278~279) <누군가의 시 한 편>에서, 황병승의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에 실린 「왕은 죽어가다」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쓴 것을 보며 카프카와 까뮈,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을 생각했습니다.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고, 밧줄로 몸을 돛대에 묶고, 혼돈의 음악을 통과하는가, 그대, 오디세우스. 카프카는 침묵의 바다를 통과하면서 세이렌의 음악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오디세우스를 보여주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침묵도 음악도 듣지 않고 오직 구원의 수단으로 밀랍과 밧줄만을 생각한다.
(후략)…
♬
세이렌들의 유방은
바다의 나선형 조가비인가?
아니면 석화된 파도이거나
거품의 정지된 놀이인가?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문학동네, 2013) 48의 일부입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작품, 철학자의 '친절한' 해설을 보고도 읽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이렌의 모습도 알지 못하지만, 그 사이렌을 이야기한 소설, 에세이조차 읽지 못하니…… 이러니까 사이렌을 만나도 그게 누군지도 모르고…… 알아봤자 어떻게 해야 할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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