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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카를로 진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by 답설재 2020. 7. 19.

카를로 진즈부르그 《치즈와 구더기》

김정하˙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하느님은 단지 은은한 숨결일 뿐이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우리는 작은 신들입니다." "하늘·땅·바다·공기·심연 그리고 지옥,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녀가 예수를 출산한 후에도 처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그가 선량한 사람이거나 선량한 이의 아들이라고 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71~72).

 

  『치즈와 구더기』? 소설인가 싶었는데 이탈리아 몬테레알레의 한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본명: 도메네고 스칸델라)의 삶에 관한 역사책(微視史)이었습니다.

  한 방앗간 주인의 역사책? 그렇다면 누가 나에 관한 역사책을 쓸 수도 있고, 쓴다면 그럼 그 책은 어떻게 전개될지, 쑥스러워서 그걸 여기에 적긴 난처하지만 스스로 두어 가지 주제를 설정해 보기도 했습니다. 웃자고 한 얘기입니다. 전혀 무용한 이야기입니다.

  각설하고,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조반니 포볼레도가 말하기를―태초에 이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거품과 같은 것이 바닷물에 부딪혀 마치 치즈처럼 엉켜 있다가 후에 그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더기들이 태어나서 인간이 되었지요. 이 구더기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현명한 것은 하느님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184)

 

  "치즈에서 구더기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들은) 자연에 의해 세상의 가장 완벽한 물질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하느님은 그들을 축복하고 의지와 지성과 기억을 주었습니다."(193)

 

  메노키오의 주장에 따르면, 하느님의 간결한 말씀, 즉 ‘오직 한마디’와 쓸데없이 긴 성서의 모순적인 관계 앞에서 성서 외전에 관한 개념 자체는 사실상 의미를 상실합니다. 메노키오의 이야기에서는 기록 문헌과 구전 문화가 어우러져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고 심오한 문화의 싹이 대지의 표면을 뚫고 나와 꽃피었으며(198), 그는 자신의 그 이념들을 종교와 세속권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해주고 싶을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강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저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발명품이며 장사라고 생각합니다."(241)

 

  아무리 그래도 사제들에게는 그의 의도는 비합법적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으므로 마침내 그는 이단 심문관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는 지상의 천국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지상의 천국은 일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살아가는 귀족들이 있는 곳이라 믿습니다."(242)

 

  이처럼 날카로운 풍자를 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죽어도 좋을 만큼 흔들리지 않을 뚜렷한 논리가 있었겠습니까? 처음에는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주장도 내어놓지만(150), 결국 농민들이 수 세대에 걸쳐 형성한 유치한 유물론과 본능을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 스콜라 철학이 뒤섞인 사상의 파편과 용어들을 사용하는 수준일 뿐이었습니다.

 

  메노키오는 처음에는 논리적인 답변도 시도하다가 모르겠다고 답하기도 하고 횡설수설도 하게 되며 감옥에서는 재판관들에게 충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겠다는 맹세를 다짐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또 악마에 이끌려 바보처럼 맹목적으로 빠져들어 주님을 모독했다는 사실을 깊이 뉘우친다는 애절한 호소문을 보냄으로써 마을로 귀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맹세대로 살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신앙 문제에 대한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자제할 수가 없어서 결국 두 번째 재판을 받았고, 또 진실을 믿는다는 탄원서를 쓰는 등 오랫동안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로마로부터의 강력한 압력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카를로 진즈부르그(저자, 역사가)는 메노키오의 독자적 사고방식이, 역사학이 소홀히 여겨온 민중 문화의 전통에서 나왔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가 메노키오 재판 기록에서 찾아낸 것은 사료상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사료의 담론 속에 억압된 민중 문화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탄압 차원에서는 마녀 재판이 강화되고 부랑자나 집시들과 같은 소외 집단들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메노키오 사례는 바로 이러한 민중 문화의 말살과 탄압을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