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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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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솔 「나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

by 답설재 2020. 8. 21.

김 솔 「나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단편소설)

《현대문학》 2020년 6월호(34~63)

 

 

 

 

 

 

설령 죽음에 처참히 굴복당하더라도 나는 결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스스로 포기하진 않겠다. 포기하는 순간, 또 다른 인간이 이곳으로 끌려와 죽게 될 것이고 분명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죽어가는 인간의 숫자보다 이곳에다 인간을 가두고 감시하는 인간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죽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신의 없는 존재인지 모든 인간에게 다시 알려지는 순간, 이전보다 더욱 잔인한 전쟁과 학살이 세계 곳곳에서 시작될 것이고, 나중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인간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지은 죄악 때문에 타인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설령 몇 사람을 죽인다고 한들 인간 전체를 모욕하는 일이 아니며, 복수의 지난한 과정 때문이라도 인간 전체가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결국 전쟁과 학살을 멈추려면 인간 전체를 절멸시키는 방법밖에 없을 텐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국에 대한 망상은 인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34~35)

 

 

사랑을 잃은 엄마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악몽을 꾼 여섯 살짜리 아이는 잠에서 깨어 울다가 아빠와 새엄마의 미움을 받아 욕실에 갇혀 무력하게 죽어간다.

그 아이의 “죽고 싶지 않다”는 독백이다.

 

 

시간은 항상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할 것이므로 인간으로 자라난다고 해서 특별히 더 얻거나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잠시 얻거나 이룬 것들은 이내 빼앗기고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용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더라도 더 이상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사랑 때문에 자식을 낳고 또 다른 사랑 때문에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인간을 결코 이해하려 하거나 동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신 인간이 결코 오염시킬 수 없는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열한 살이 된 뒤에도 여전히 삶이나 죽음에 고무되지 않는다면 내 친엄마처럼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시간의 영원한 승리를 기꺼이 찬양할 것이다. 그때도 인간의 법과 윤리가 나의 시도를 방해하겠지만 인간을 살리는 직업이 있다면 당연히 인간을 죽이는 직업도 있을 테니 그것의 도움을 받으면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따금씩 아빠나 이복동생의 꿈에 나타나 그들을 한밤중에 울게 만들 것이고 그들이 섣부른 반성으로 타협을 시도할 경우 더욱 기괴한 악몽을 눈앞에서 연출해 보일 것이다. 여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아니 석 달 동안 표백제 섞인 물과 소금기만으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미증유의 생명체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복수하는 방법이라면, 기괴한 악몽을 현실과 뒤섞어놓아 현실의 분량을 늘리는 것뿐이다.(56~57)

 

 

너무 억울하다. 부모의 찌꺼기로 빚어져서 부모의 그림자가 될 운명이라면 굳이 왜 나는 태어났을까. 정말 그들의 사랑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랑의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결과였을까. 그 사랑에 목적이나 결과가 있기나 했을까. 적어도 저 문밖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나는 실패한 사랑의 표식일 뿐이리라. 하지만 실패하지 않는 사랑도 있을까. 아빠와 새엄마의 사랑도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실패시키기 위해 신이 매장해놓은 지뢰 같은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쓸쓸하게 죽고 나면 그다음엔 나의 이복동생이 이곳에 갇히게 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부모에겐 자식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연장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고, 오히려 자신의 삶이 자식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 어쩌면 이곳은 문자나 언어가 신과 직접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 수도자들이 사막 한가운데에 세운 수도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곳의 처참한 광경을 구경하게 될 신에게, 제발 인간에게서 사랑하는 능력을 영원히 거세해달라고 부탁하겠다.(57~58)

 

 

이 작가는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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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솔 1973년 광주 출생. 2012년 『한국일보』 등단. 소설집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 번째』『망상,어語』. 장편소설 『너도밤나무 바이러스』『보편적 정신』『마카로니 프로젝트』『모든 곳에 존재하는 로마니의 황제 퀴에크』. 〈문지문학상〉〈김준성문학상〉〈젊은작가상〉수상.(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