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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최진영 《내가 되는 꿈》나는 어떤 부모, 어떤 교사일까?

by 답설재 2020. 5. 22.

나는 어떤 부모, 어떤 교사일까?

최진영 《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2020년 5월호 90~158.

 

 

 

 

 

 

 

    1

 

요즘 소설(단편)들은 의욕이 넘친다. 그렇지만 시작 부분에서 호기심을 갖게 해 놓고는 오리무중 혹은 지지부진에 빠진다.

 

오르한 파묵은 이렇게 썼다(「다른 색들」). "내가 믿을 수 있는 촘촘하고 밀도 있고 심오한 소설은 무엇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삶에 매이게 한다." 오르한 파묵이 촘촘하고 밀도 있고 심오한 소설이라고 한 것은 어떤 소설일까? 그게 철학을 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소설'이니까 재미있으면 좋겠다. 재미있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왜 철학까지 하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누가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인지, 누가 그런 걸 좋다고 했는지….

 

나는 노인이어서 책을 읽는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는 건 철학을 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지 재미 때문이다. 시간이 아깝다. ‘이걸 소설이라고…’ ‘이런 것도 소설이라고?’ ….

 

번역본 소설은 '번역본'인데도 쉽고 재미있다. ‘국산’인데도 어렵고 지루하고 내 이해력이 죽을 때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미흡하고 형편없다는 걸 인식하게 해주는 건 독자로서는 억울하다.

 

 

    2

 

이 소설(중편)은 재미있다. 편하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그렇지만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소설이다.

무서운 것도 술술 이야기해준다.

 

언론에 등장하는 사실들은 끔찍해도 곧 잊힌다. 진실로 무서운 것은 사실보다는 진실이다. 소설은 진실을 전해준다.

 

 

    3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교장과 담임, 부모,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다.

 

* 초등학생일 때의 이야기에서

 

교장은 교단에 서서 술 취한 사람처럼 말을 많이 했다. 줄 맞춰 선 우리들 옆을 지나가던 담임이 얌전히 서 있으라고 지적했다. 자기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90)

 

상장을 받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를 하지 않는 데에도 큰 다짐과 용기가 필요했다.(91)

 

담임은 어쩌고저쩌고 얘기했다. 우리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복도에 서 있는 어른들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만약 우리만 있었다면 그렇게 점잖게 말하지 않았을 거다. 욕이 열 번은 섞였을 거다.(91)

 

집을 나오면서 나는 짜증에 받쳐 울었고 기차를 타기 전에 엄마가 크림빵과 바나나 우유를 사줘서 웃었다.(93)

 

그래, 애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못 보는 걸 본다고. 어른들이 저게 떡갈나무냐 박달나무냐, 여기로 도로가 뚫리면 땅값이 어떻게 되는 거냐 같은 걸로 싸울 때 애들은 완전히 다른 걸 본단 말이야. 나무 앞에서 나무만 보는 우리가 불쌍한 거지.

엄마와 아빠는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와 아빠는 어떤 이야기로도 싸울 수 있다. 그날은 내가 공룡을 봤다고 말해서 싸웠다.(93~94)

 

엄마는 중학교는 외갓집에서 다니는 게 어때?라고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어른들은 자기들에게 안전한 질문만 한다.(94)

 

다음 시험에서 나는 65점을 맞았는데 그때는 담임이 아무도 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더 억울해했다. 우리는 노래를 다 외우지 못했다고, 공책에 낙서를 했다고, 복도에서 뛰었다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맞았다. 그런데 노래를 다 외우지 못해도, 공책에 낙서를 해도, 복도에서 뛰어도 맞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기준은 담임만 알았다.(96)

 

담임은 야단칠 때마다 가정환경을 들먹였다. ‘이런 촌구석에서 백 점 맞아봤자’와 ‘이런 촌구석에서 공부까지 못하면’을 뒤섞어서 우리의 미래를 저주했다.(96)

 

담임은 기분이 좋을 때면 여자아이를 자기 무릎에 앉히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입술에 뽀뽀하라고 시켰다.(96)

 

여긴 왜 왔느냐고 순지가 물었다.

담임 책상에 똥을 누려고.

순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때리면서 웃었다.(100)

 

* 중학생일 때의 이야기에서

 

아빠라면 돈만 주고 알아서 사 입으라고 했겠지. 내가 큰 옷을 입고 있어도 큰 옷인지 모르겠지. 아빠 양복을 입고 있어도 그게 자기 옷인지 모르겠지.(104)

 

내가 초등학생일 때, 가끔 집에서 마주치면 아빠는 내게 물었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느냐고. 내가 만약에 아빠한테 ‘회사는 잘 다니고 있어?’라고 묻는다면 아빠는 뭐라고 대답하겠나. ‘잘 다니고 있으니 걱정 말고 너나 잘해라’라고 대답하지 않을까?(104)

 

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 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름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 지름길.(104)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 테니까. 자기 일이나 자기 존재 말고 ‘자식’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니까.(104~105)

 

진짜 문제는, 아빠는 자기 자신도 그런 틀 안에 가둔다는 거다.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사람을 자기라고 생각해버린다. 내가 보는 아빠와 아빠 본인이 믿는 아빠는 너무 다르다.(105)

 

뭐, 나도 언젠가는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열네 살이다. 나보다 두 배 넘게 나이가 많은 아빠도 아직 그런 사람이 못 된 것 같은데 어떻게 내게 그런 걸 바랄 수 있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뜬금없이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고 그 애와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니, 그건 경찰이나 하는 짓이다.(105)

 

아빠가 원하는 삶은 아빠의 머릿속에만 있다. 아빠는 삶이 알아서 그렇게 되어주길 원한다. 아빠는 자기가 바로 삶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105)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메었고 멜 교과서와 문제집의 무게를 생각하니 ‘단련’이나 ‘수련’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 지구 같은 돌멩이를 지고 다니면서도 어른들은 그 무게를 거의 실감 못 한다. 단련되었으니까.(112~113)

 

한수는 중간고사에서 전 과목 통틀어 네 문제를 틀렸다. 우리는 한수를 재수 없는 년이라고 불렀다. 기말고사에서는 두 문제를 틀렸다. 우리는 한수는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

1학년 마지막 시험에서 한수는 올백을 맞았다.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한수는 장래 희망은 없다.(117~118)

 

할머니는 이모가 무언가를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처신 잘하고 다니라고 야단을 친다. 이모에게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기면 할머니는 그걸 이모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운이 좋거나 주면 사람이―콕 집어 말하면 남자 어른이―힘을 써줬거나 (…) (126)

 

그래서 언니가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엄마 눈에는 언니가 행복해 보여?

이모가 이렇게 물어보면 할머니는 행복 같은 건 중요하지 아니라고, 사람의 도리가 중요한 거라고 대꾸한다.(127)

 

열한 살인가 열두 살일 때 엄마 아빠와 바다에 갔었다. 웃으면서 출발했고 화난 채로 돌아왔다.(145)

 

아빠는 ‘싫다’는 내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다시 말했다. 바다에 들어가보자.

나는 싫다고 대꾸하면서 이제 곧 아빠가 화를 내겠구나 짐작했다.(155)

 

객관식 문제는 대개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다음 중 옳은 답을 고르시오. 지금 내 눈에는 죄다 오답으로 보인다. 둘은 서로를 마음껏 미워했으면서, 그래서 내게도 미움을 옮겼으면서, 이제 와서 미워하지 말라니,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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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1981년 출생. 2006년『실천문학』등단. 소설집『팽이』『겨울방학』. 장편소설『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끝나지 않는 노래』『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구의 증명』『해가 지는 곳으로』『이제야 언니에게』. 〈한겨레문학상〉〈신동엽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