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슈발리에 《진주 귀고리 소녀》
양선아 옮김, 강 2004
1
2004년에 읽고 엄청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을 차려서 '썩' 좋은 독후감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게 16년,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습니다.
이번에도 '정신을 차려서' 썩 좋은 독후감을 쓰려고 하면 나는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읽거나 이곳저곳 자세히 살펴봐야 할 테니까 결국 독후감 숙제를 또 미루기 쉽고, 그러면 세월은 또 유수와 같이 16년쯤 흐른다면 2036년 경에 다시 마음을 먹게 될 것 같아서 오늘 그냥 생각나는 대로 메모라도 해놓고 말기로 했습니다. 썩 좋은 독후감 쓰기는 내겐 불가능한 일이고 괜히 세월만 가니까 아예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2
표지의 소녀는 베르메르라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가 그렸는데, 그 화가는 거장(巨匠)이긴 하지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점은 소설가가 허구화하기에 더 좋겠지요?
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의 저자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그 화가 베르메르가 그림(23점)을 그리는 과정을 진짜처럼, 자신이 화가를 따라다니며 다 본 것처럼 이야기를 꾸몄는데 나는 그 스토리에 심취해서 이 소설을 그만 베르메르의 전기로 여기게 된 느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건 소설이야!' 생각하면서도 '베르메르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렇게 그린 화가'라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넘친 것일까요? 엄청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팔리진 않은 소설인 것만 봐도 철저히 주관적인 감동이었을까요?
3
소설의 긴장감은 소녀와 화가의 관계 때문입니다.
'화가가 저 예쁜 소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냥 모델일 뿐이야. 모델에 대한 관심일 뿐이야. 그럴까? 아무리 하녀라도 이성이니까, 모델이 된 여인을 사랑한 화가가 어디 한둘인가? 아무래도 사랑한 것이겠지? 아니야, 아니야, 눈이 등잔 같은 화가의 부인이 있고, 더구나 소녀를 사랑하는 청년도 있는데?'
그 긴장감은 내내 풀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이어집니다.
"귀를 보여다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모자 밑으로 느슨하게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 후에 모자를 뒤로 당겨서 귓불 있는 쪽이 보이도록 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목에서도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지만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지그시 눌렀다.(228)
"자, 그럼 시작하자. 턱을 약간 아래로."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입술을 적셔라, 그리트."
나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입을 조금 벌리고."
뜻밖의 주문에 너무 놀라, 내 입술을 저절로 살짝 벌어졌다.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나는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정숙한 여인은 그림 속에서 결코 입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피터와 내가 골목길에 있었을 때 마치 그도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고 있어요. 나는 다시 입술을 적셨다.
"좋아." 그가 말했다.(249)
4
베르메르의 작품 중 「델프트 풍경」에 대한 프루스트의 일화가 있습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프루스트가 그 그림 앞에서 실신한 적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나는 「델프트 풍경」을 본 적이 없고 볼 수 있는 건 그 그림을 찍은 사진뿐인 데다가 그 얘기마저 이미 두 번이나 썼습니다.
인터넷 서핑을 해보면 그림 「델프트 풍경」을 찍은 사진이 많고 대부분 유사한 수준들이지만 그중에는 비교적 잘 찍은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베르메르의 작품 중 훨씬 더 실감이 가는 작품 사진은 역시 이 책 표지의 저 「진주 귀고리 소녀」입니다. 저 책을 어디 세워놓고 바라보면 저 소녀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아서 민망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한번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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