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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피천득 외 《한국의 명수필》

by 답설재 2020. 5. 20.

피천득 외 지음 《한국의 명수필》

손광성 엮음, 을유문화사 2013

 

 

 

 

 

 

그믐달

―――

나도향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 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되,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이나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명수필? 수많은 그 수필 중에?'

열심히 읽었다.

간혹 아직도 이어지는 '2019의 이 시간들'을 잊을 수 있었고, 그럴 땐 즐거웠다.

 

60여 편 중에는 지루한 글도 있어서 몇 편은 읽다 말았지만 필사해놓고 싶은 작품을 표시해보았더니 25편이었다.

지인의 글에도 부러운 ⊙표를 해두었다.

「짜장면」(정진권), 「장작 패기」(손광성), 「동해(東海」(백석), 「굴욕」(송혜영)은 ⊙표 두 개씩을 주었는데 나중에 정신이 없더라도 꼭 한 번 더 읽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읽은 듯한 예닐곱 편이 지금 보니까 다른 작품보다 낫지 않아서 교과서에 실렸다고 '명수필'에 넣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