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의 소개로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옮겨 썼습니다. 연주를 지켜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모습이 보일 듯한 부분입니다. 번역을 하고 있는 김화영 교수가 '벵퇴유의 소나타'라는 소제목을 붙인 부분인데 몇 년 몇 월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DAUM의 블로그 시스템은 각주를 달 수 있어서 출처를 메모해 두었는데 블로그 시스템이 변하면서 변환을 시키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줄을 비운 곳은, 제 마음대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읽기에 좀 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끝냈을 때 스완은 좌중의 누구에게보다도 그 피아니스트에게 더 친절하게 대했는데 그 까닭은 이러했다.
일 년 전 그는 어떤 야회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어떤 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악기들에서 스며 나오는 음의 물질적 특징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여리면서도 탄력 있고 밀도 높으며 곡을 리드하는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선 밑에서, 갑자기 피아노 파트의 선율이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 낮추어진 파도의 연보랏빛 소용돌이처럼, 온갖 모습을 띠다가 한 덩어리로 합쳐지고 잔잔해지다가 다시 서로 부딪치면서, 물결처럼 찰랑거리며 솟아오르려고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벌써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윤곽을 뚜렷하게 분간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속에 기쁨을 자아내는 것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도 없으면서도 갑자기 매혹에 사로잡힌 그는 마치 축축한 저녁 공기 속에 퍼지는 어떤 종류의 장미 향기가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 지나가는 길에 그의 영혼을 활짝 열어준 그 악절인지 아니면 화성인지―그도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를 마음속에 거두어들이려고 애를 썼다. 그가 그처럼 어렴풋한 인상을, 그러면서도 어쩌면 순수하게 음악적이고 극도로 한정된, 완전히 독창적이고 어떠한 다른 범주의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가 음악을 모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받은 이런 종류의 인상은 말하자면 실체實體가 없는 그 무엇이었다. 분명 그때 우리 귀에 들리는 음들은 그 높고낮음과 장단에 따라서 우리들의 눈앞에 다양한 크기의 표면들을 덮으려 하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려 하고, 우리에게 넓음, 가늚, 안정, 급작스런 변화의 느낌을 주려고 한다. 그 음들은 그런 느낌들이 우리의 내면에서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려서 그 뒤를 잇거나 또는 그와 동시에 나오는 음들이 벌써부터 불러일으키는 느낌들에 묻혀버리는 일은 없다. 그러나 마치 출렁거리는 파도 한가운데다가 견고한 토대를 만들어 세우기 위하여 작업하는 노동자처럼, 만약 우리의 기억이 쉬 사라져 버리는 이 악절들의 복사물을 만들어 우리에게 그 악절과 그 뒤에 이어지는 악절을 서로 비교 구별하도록 해주지 않는 한, 분간하기도 어려운 모습으로 순간순간 솟아올랐다가 금세 밑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그 모티브들, 그것이 주는 특별한 쾌감을 통해서 인식될 뿐 뭐라고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용하기도 어려운 그 모티브들을 그 인상은 계속적으로 그것 특유의 유동성과 '페이드아웃' 운동에 의하여 뒤덮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스완이 느꼈던 그 감미로운 느낌이 소멸되자마자 그의 기억이 당장에 그 느낌의 개략적이고 임시적인 사본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는데 그 곡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그가 그 사본에 너무나 열심히 눈길을 던지고 있었던 탓인지 그 인상이 갑자기 되돌아오게 되었을 때는 그 인상이 이제 더 이상 포착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아니었다. 그는 그 인상의 넓이, 대칭을 이루는 결합, 그 표기법, 표현력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그가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소묘요 건축이요 사상이면서 또한 음악을 상기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었다.
그제야 그는 분명하게 소리의 물결 위로 잠시 동안 솟아오르는 하나의 악절을 뚜렷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그 악절은 곧 그에게 특별한 관능적 쾌감을 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 악절을 듣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이 악절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느끼게 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쾌감이어서 그것에 대하여 그는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사랑 같은 것을 느꼈다.
느린 리듬으로 그 악절은 처음에는 여기, 다음에는 저기, 또 그다음에는 다른 곳, 이렇게 고귀하고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뚜렷한 행복으로 스완을 이끌어갔다. 그러다가 그 악절은 돌연 어떤 지점에 이르러 스완이 따라가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순간 잠깐 동안의 휴지를 두었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한결 빠르고 가늘고 구슬프고 끊어짐이 없고 부드러우며 새로운 움직임으로 미지의 원경을 향하여 그를 데리고 갔다. 그런 뒤 악절은 사라져 버렸다. 스완은 세 번째로 그 악절을 다시 한 번 더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과연 그 악절은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전같이 그에게 분명하게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심지어 거기서 일어나는 관능적 기쁨마저도 그 깊이가 전만 못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그 악절에 대한 욕구를 느꼈다. 그는 이를테면 지나가다가 언뜻 본 여자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이제 막 그의 삶 속에 심어준, 바로 그런 경험을 한 사내와도 같았다. 이름도 모르면서 벌써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그 자신의 감수성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이상의 어떤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 악절에 대한 이 사랑은 한순간 스완에게 젊어질 가능성 같은 것을 부여할 것만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자기의 삶을 어떤 이상적인 목표에 집중시키는 것을 포기한 채 너무나 오랫동안 그저 일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구태여 입 밖에 내어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태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터였다. 게다가 이제는 마음속에 더 이상 고상한 생각을 품지 않게 되면서부터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의 현실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그걸 더 이상 믿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물의 근본은 한쪽으로 제쳐둘 수 있게 해주는 하찮은 생각들 속으로 도피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는 사교계 출입을 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듯이, 그 대신에 일단 어떤 초대를 받아들였으면 반드시 가야 하며 만일 나중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면 방문의 표시로 명함을 두고 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스완은 대화 중에 절대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이를테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면서도 스완 자신의 진정한 능력은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디테일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얘기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요리 만드는 법, 어떤 화가가 태어난 날이나 죽은 날, 그 화가의 작품 총목록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극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그가 어떤 작품이나 어떤 인생관에 대하여 무심코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수가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는 자기가 하는 말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라는 듯 그 말에 어딘가 좀 비꼬는 투를 가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병약한 사람들의 경우, 갑자기 어떤 고장에 도착했다든가, 식이요법이 달라졌다든가, 때로는 신체기관에 어떤 자연스럽고도 신비로운 변화가 생겼다든가 하여 그들의 병이 현저하게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 결과 뒤늦게 전혀 다른 인생을 시작할 뜻밖의 가능성을 고려해보게 되는 수가 있는데, 스완도 그런 사람들처럼, 전에 들었던 악절의 기억 속에서, 혹시나 그것을 찾아낼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연주를 부탁했던 몇 가지 소나타들 속에서, 그가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던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현실들 중 하나의 존재를 자기의 내면에서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적 메마름에 음악이 일종의 선택 친화적 영향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 보이지 않는 현실에 자신의 삶을 바치고 싶다는 욕망, 아니 삶을 바칠 힘을 다시금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자기가 들은 곡이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가 없는지라 그 곡을 입수하지 못한 채 지내다가 결국은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그 주일 안에, 그와 같이 문제의 야회에 왔었던 몇 사람을 만나 물어보긴 했지만 그중 여럿은 음악 연주가 끝난 뒤에 왔거나 아니면 시작되기 전에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도 몇 사람은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그곳에 있었지만 몇은 다른 방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또 몇은 남아서 듣긴 했지만 다른 이들보다 더 낫게 들은 것이 없었다. 한편 그 집주인들로 말하자면, 그 곡이 자기들이 청해온 음악가가 연주하기를 원했던 어떤 새로운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음악가들은 연주여행을 떠나고 없었으므로 스완은 그 작품에 대해서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도 물론 음악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절에서 받은 특별하면서도 옮겨 표현할 수 없는 그 쾌감을 생생하게 기억은 하지만, 또 그 악절이 그려내는 형상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것을 음악가 친구들에게 노래로 들려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는 그 악절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베르뒤랭 부인 집에서 그 젊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뒤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갑자기 하나의 높은음이 두 소절에 걸쳐서 오래 계속되고 나서, 속에 품고 있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무슨 소리의 커튼처럼 길게 늘어뜨려 쳐놓았던 그 음향의 밑자락에서 스완은 그가 사랑하는 공기 같고 향기 같은 그 악절이 은밀하게 살랑거리며 갈라지듯 빠져나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독특한 것으로, 너무나도 개성적이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기 때문에 스완으로서는 마치 길에서 마주치자 그만 반해버린 여자, 그러나 다시는 만날 길이 없을 것 같아 절망하고 있던 여자를 단골로 드나들던 살롱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내 그 악절은 스완의 얼굴에 그 미소의 그림자를 남기면서, 그 향기의 갈래와 갈래 사이로 길을 찾아 재빨리 멀어져 갔다. 그러나 스완은 이제 그의 이 알 수 없는 존재의 이름을 물어볼 수가 있었다.(그것은 벵퇴유 작곡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의 안단테라고 했다.) 그는 이제 그것을 손안에 넣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원하면 어느 때라도 그것을 대할 수 있고 그것의 언어와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책 보기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나 실리그 《인지니어스 INGENIUS》 (0) | 2022.04.06 |
---|---|
체피 보르사치니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 EL SISTEMA (0) | 2022.03.31 |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0) | 2022.03.25 |
사문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0) | 2022.03.13 |
교육학, 이런 교과서로 공부했더라면... (0) | 202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