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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할아버지의 사전

by 답설재 2020. 1. 26.












할아버지의 사전






크고 누런 설명서를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루실이 의자에 무릎을 꿇은 채 첫 번째 단계를 읽기 위해 식탁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사전이 필요하겠어." 루실의 말에 내가 거실 책장으로 사전을 가지러 갔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낡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이제까지 한 번도 들춰 본 적이 없었다.

"우선 옷감을 펼쳐 놓는다.” 루실이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옷본 전체에 핀을 꽂은 후 그것을 잘라 낸다. ‘핑킹 가위 좀 찾아봐.’” 사전의 P 부분을 펼쳤다. 그랬더니 그 안에 말려 놓은 팬지꽃(pansy)나 다섯 송이나 들어 있었다. 하나는 노랗고 또 하나는 검푸르고 세 번째는 적갈색, 네 번째는 보라색, 마지막 송이는 담황색이었다. 팬지꽃은 판판하면서도 뻣뻣하게 말라 있었는데, 나비 날개처럼 굳었으면서 훨씬 더 부서지기 쉬웠다. Q 부분에서는 야생당근(queen anne’s lace)의 어린 가지가 나왔는데, 납작하게 찌부러진 모습이 꼭 소회향처럼 보였다. R에서는 온갖 장미(rose)들이 다 나왔으니, 붉은 장미가 든 페이지는 장미 형태에 따라 사전의 양쪽 페이지가 조금씩 뒤틀렸고 분홍색 들장미도 들어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루실이 물었다.

"사전에 말린 꽃이 잔뜩 들었어.” 내가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개불알꽃을 O에 넣으셨네. 아마 난초(orchids)일 거야.”

"어디 좀 봐.” 루실이 말하고 나서 사전의 양쪽 모서리를 잡고 흔들어 댔다. 수십 장도 넘는 꽃송이와 꽃잎이 책장 사이에서 떨어져 내렸다. 루실이 더 이상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흔들어 댄 뒤 사전을 도로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핑킹가위.”

"이 꽃들 어떻게 하지?”

"난로에 넣어 버려.”

"왜 그렇게 하는데?”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데?” 물론 진짜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루실이 적갈색 눈썹을 내리깐 채 뻔뻔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40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서 숨막힌 채 지내온 팬지꽃을 매정하게 다루는 일이 죄가 아니라는 듯이. “왜 옷 만드는 일을 안 도우려고 그래? 언니는 그냥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거라고.”

"다른 책에 넣어 둬야겠다.”

루실이 두 손을 모아 꽃을 퍼 올리더니 손바닥 사이에 놓고 짓뭉개 버렸다. 내가 기를 쓰고 사전으로 그 애를 때리려고 했으나, 루실은 왼쪽 팔꿈치로 사전을 막는 것과 동시에 내 왼쪽 기를 아주 멋지게 한 방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사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당연히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나서 한 방 갈기려고 했지만, 루실은 뼈만 앙상한 팔뚝으로 잘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내 갈비뼈를 치기까지 했다. "좋아, 안 도와줄 거야." 그렇게 선언하고 주방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소설 하우스키핑에서 본 장면입니다(170~172).

지금 내가 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히 저렇게 손자 손녀에게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할까? 버릴까, 그냥둘까? 수없이 망설이며 살아온 세월 속에서 그 망설임의 이름으로 사라져 간 책들이 매번 '무더기' '무더기'여서 죄로 치면 나는 무기징역일 것입니다.

그래도 몇 천, 적어도 몇 백 권은 남을까요?

남는다고 해서 좋은 수가 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조차 허망한 기대가 분명합니다.


"아빠가 책을 버린대. 어떤 책은 이건 정말 아깝다 하면서.”

"무슨 책인데?”

"무슨 역사 이야기 같았는데?”

"우리나라?”

"아니.”

"그럼, 중국?”

", 그런 것 같아삼국시대였던가?”

", 삼국지?”

"응! 삼국지!”

"내게 갖고 오라고 해.”

"알았어!"


그렇게 해서 '귀가'한 서문문고 삼국지 여섯 권은, 세로쓰기로 된 1970년대의 것인데 오긴 왔지만 제 자리도 잡지 못하고 더부살이하듯 다른 책 위에 얹혀 있으니 여기 와서도 결코 귀한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대접을 받는 책들이 손자 손녀의 것이 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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