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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암인가?

by 답설재 2020. 1. 18.

 

 

 

 

  1

 

아내는 감기 때문에는 결코 병원에 가지 않는다. 가령 발을 삐어도 그런 것쯤으로는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내가 어디 불편하다고 하면 그 태도가 돌변한다.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병원에 가지 않고 왜 그러고 있어?"("어떻게 하려고 그래?" 혹은 "오늘은 꼭 병원에 가.")

그렇게 해놓고 정작 본인의 문제가 될 땐 해석이 다르고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 일로 다툰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원에 가지 그래?"("함께 병원에 갈까?") 그런 식 대화는 이미 옛날 얘기다. "아니."("안  가도 돼." 혹은 "어제보다 많이 나았어.") 그러면 그만이다.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어제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일 때, 정말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싶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왜 병을 키워?"("우리가 매달 내는 의료보험료가 얼만지 알기나 해?")

그 정도의 대화가 이루어지면 이미 대판 시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언쟁이 문제를 해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잠시라도 언짢은 분위기가 될 뿐이고 마지못해서라도 병원에 가는 일이 일어난 적도 없다. 그럴 때 약이 오르고 분이 나서 생각하는 것이 있다. '병이 커지면 후회하겠지? 내 말을 잘 듣겠다고 다짐하겠지?'

그렇지만 이건 또 뭐지? 그 병이 커지지 않으면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아내의 병은 결국 커져야 마땅하다는 것인가?

 

 

  2

 

그러던 아내에게 달라진 점 두어 가지가 있긴 하다. 육류를 좋아하면서도 극도로 자제하게 된 것과 2년 정도 주기로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건 10년쯤 전 내가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나서부터였다.

대개 무슨 병으로 쓰러지면 환자 본인이 죽을 지경이었던 것으로 얘기하지만 그런 병이 있고 그렇지 않은 병이 있는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아내는 나 때문에 세 차례에 걸쳐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정작 나는 자질구레한 불편함을 제외하면 중요한 시간에는 혼수상태였을 뿐이어서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이나 나 자신은 바꾸기를 싫어하고 자꾸 옛 습관과 태도로 회귀하려고 하지만 아내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을까? 119에 연락해서 위급한 신호와 함께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만 해도 가족은 번거롭고 조마조마 했겠지만 정작 나는 의식이 있을 순간에만 잠시 '내가 또 실려 가는구나' 했을 뿐이었다.

간추리면, 아내는 내 심장병의 주원인이 이 못된 성정머리 때문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스트레스였고 담배나 술, 육류 섭취 같은 건 다 더해봐야 15%?, 기껏해야 20% 정도의 비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아내로서는 담배나 술은 본래 하지 않던 것이니 육류를 피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이 되었고, 그건 고정관념으로 정착되어서 지금은 그 병원 의사들이 하루에 육류를 얼마씩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봤자 쇠귀에 경 읽기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행인 것은 생전에 받지 않을 것 같았던 건강검진을 받게 된 것인데 그것도 내가 심장병 때문에 드나드는 그 병원에서 우리 형편으로는 고급이라고 해야 할 수준의 검사를 대개 2년 주기로 받게 된 것이었다.

 

 

  3

 

지난번 검사는 그해 4월 21일 아침에 받았다. 아침을 굶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쿨프렙인가 뭔가 하는 약과 대량의 물로 속을 비워내는 일이어서 "건강검진" 하면 우선 그 일이 머리를 휘저어 놓는다.

아내는 전날 저녁과 당일 새벽에 걸친 그 과정을 그런대로 순조롭게 거쳐 검진센터 여성 출입구로 들어갔으므로 두어 시간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출구 쪽 소파에 앉아 신문도 보고 휴대전화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나서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아내의 '경과보고'를 듣게 되었다.

보고는 아주 간단했다. 나중에 세밀한 종합적 판정이 나오겠지만 별일이 없었고, 이전의 검사에서 관찰 대상으로 지목된 부분에서도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다만 대장내시경검사에서 세 개는 제거했지만 제거되지 않은 용종이 딱 한 개가 있어서 그건 소화기내과에서 별도로 제거하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는 그 얘기를 아주 담담하게 전했다. 모든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단 한 가지, 그것만 그렇게 되었으므로 내가 듣기로는 소화기내과에서 별도로 그 용종 한 개를 제거하는 것쯤은 아주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용종으로부터 조직을 떼어내서 별도의 검사를 의뢰해놓았다는 것과 20일 후 소화기내과에서 용종 제거 수술 예약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놓았다는 설명을 듣고 귀가했다.

 

 

  4

 

왜 20일 후일까? 그것도 건강검진센터를 통한 예약이어서 빨리 잡힌 날짜라고 했지만 그 20일이 문제였다.

우리는 그 20일 동안 노심초사였다. 아내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나는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야. 크기가 10밀리미터를 초과하는 용종은 검진센터에서 제거하지 않고 소화기내과에서 제거하도록 되어 있을 뿐이야." 했고, 속으로는 대장내시경의 목적이 '대장암 선별검사 및 대장암으로의 진행 가능성이 있는 용종의 발견과 제거'라는 것을 자꾸 상기하고 있었고 조직검사를 의뢰해놓았다는 설명도 점점 더 심각한 수준으로 해석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 이런! '아내의 대장에 암이 들어 있다는 말이지?' 그 생각도 했고, 조금 더 발전시켜서 '지금은 당연히 1기니까 치료도 그만큼 쉽겠지?' 그 생각도 했고, 우리의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올지도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아내가 대장암 환자로 보이기도 했다.

아내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혹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별로 말이 없었던 아내에게는 사실은 내가 아는 것들은 이미 다 아는 내용들이었고 내가 우려하는 것들도,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심각한 수준의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20일에 아내는 급속도로 수척해져 갔고 나는 나대로 밥맛이 떨어지고 체중도 줄어들기 시작하고 하는 일에도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5

 

마치 점점 더 어두워지고 점점 더 답답한 굴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 20일은 초조하고 지루하면서도 어김없이 지나가 5월 11일 아침이 밝았고, 마치 무슨 결심 판정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다시 건강검진센터를 찾아가 '종합건강진단 결과지'를 받았다.

암은 아니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온 누리에 비치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었다. 담당의사의 검사 항목별 설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건 암에 관한 것이 아니어서 두려운 대상이 전혀 아니었으므로 나는 무슨 텔레비전 프로그램 하나를 시청하듯 했고, 그 느낌으로 소화기내과를 찾아가 용종을 제거하게 되는 날짜 배정을 받았고, 주의사항을 듣고 준비물을 받았다.


이후의 일들도 구체적으로는 새삼스럽고 구차한 점이 없진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도 더 지난 6월 14일에, 그 쿨프렙인가 하는 걸 대량의 물과 함께 복용하고 속을 깨끗이 비워서 소화기내시경센터에 들어가 용종을 제거했고 다시 한 달쯤 지난 7월 13일에 용종 제거가 잘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6

 

이제 어떻게 되는가?

이런 일은 2년 정도 주기로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건강검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자질구레한 것들 때문에 걱정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지낸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인이다" 혹은 그 유사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주 무슨 암 말기에 산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주인공이 사실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 자신은 어떻게 이렇게 의지가 빈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한탄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암에 걸리면 건드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여지없이, 저절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나는 그저 눈처럼 녹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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